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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Oct 05. 2023

사랑, 끝내 꺼지지 않는 점멸 신호

읽는 마음 (최진영, '구의 증명')

사랑. 이 세상에 이 두 글자만큼 흔하디 흔하면서, 증명해 보이긴 어려운 말이 또 있을까. 그만큼 사랑은 쉽지 않다. 나 역시 그것의 깊이도 넓이도 정확히 알 수 없어 어렴풋이 짐작만 해볼 뿐이다. 그러니 내게 사랑은 아는 일보다 믿는 일에 가깝다. 최진영 작가의 소설 ‘구의 증명’에 등장하는 사랑 역시 참 괴로운 사랑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하고도 슬픈 사랑이다.



남녀 주인공 ‘구’와 ‘담’은 어릴 적 친구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어른이 된 구가 죽은 후, 담이의 마음을 독백으로 그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구는 죽었으나 담이는 구를 잊지 않으려 한다. 부모 대신 빚을 떠 앉고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를 담이는 조건 없이 좋아했다. 돈 때문에 위축되고 초라했던 마음과 삶을 닮은 듯 구의 ‘마르고 작은 몸’은 담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구가 죽자 그의 몸에 칼을 댈 수도, 불을 댈 수도 없는 담이. 땅 속에 묻거나 태울 수도 없어 담이는 구의 죽은 몸을 먹는 것으로 그를 애도한다.



“우리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러니 분명 아름다운 순간도 있었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함께일 때 가능했다. 구에 대한 모든 것은 나도 알고 있어야 하며 내가 모르는 것은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는 욕심.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을 구 혼자서만 품고 있는 것이 싫었다. 마음에서 나를 잠시라도 지우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구의 기쁨과 환희, 우울과 절망에도 내가 있어야 했다. 그 욕심은 오직 구만을 향했다. 담아. 우리를 기억해 줄 사람은 없어. 우리가 우리를 기억해야 해. 스물세 살 봄의 언저리였을 것이다. 구가 일회용 카메라를 손에 쥐고 말했다.”(p.103)



구와 담의 삶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우리가 우리를 기억해야 한다’는 문장은 두 사람이 겪었던 인생의 결핍만큼 슬프다. 담은 부모의 부재 속에 할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외롭게 자랐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때까지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이모와 살게 된다. 담이는 다시 이모의 보살핌을 받지만 마음속 부채 의식을 느낀다. 절에서 내려와 일을 하게 된 이모에게 자신은 ‘짐짝’ 같다 여긴다.(p.94)



반대로 구는 부모가 존재했으나 제대로 양육받지 못하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삶을 산다. 구와 담이의 이름을 떠올리면 커다란 담벼락에 기댄 공 하나가 그려진다. 담이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공처럼 불안정한 구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채주는 존재다. 여러 일을 전전하며 한 곳에 정착해 살지 못하는 구를 담이는 늘 걱정한다.



"나도 구가 걱정되었다. 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몸은 건강한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걱정하는 마음, 그 마음이 점점 커져서, 내가 내 상처를 겁내는 마음을 가려버렸다. 불행이 또 다른 불행을 가려버리듯."(p.96)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걱정하는 마음’이 뒤따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까 봐, 아플까 봐, 죽을까 봐 걱정한다. 담이 이모는 그 마음이 제일 중요하니 까먹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p.95) 그런 마음이 가닿아서인지 구와 담은 헤어졌다가도 다시 만나고, 그늘진 구의 삶 속에 한 줌 빛이 드리워지기도 한다.



"노마가 집에 들어가 문 잠그는 소리까지 듣고, 담을 들여보내며 내일 보자 인사하고, 집에 돌아와 대충 씻고 누우면 일어나야 할 시간까지 네다섯 시간쯤 남아 있곤 했다. 몸은 고되고 앞날은 곤죽 같아도, 마음 한구석에 영영 변질되지 않을 따뜻한 밥 한 덩이를 품은 느낌이었다.”(p.73)



‘노마’라는 아이는 소설 속에서 구와 담의 삶에 스며든 행복이자, 희망을 품게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구는 이담에 뭐가 될지, 스스로 겁내던 질문을 노마에게 던지며 자신도 ‘따뜻한 밥 한 덩이’ 같은 꿈을 품는다. 바로 울트라 캡숑 아빠가 되는 것.(p.162) 노마의 사고와 담이 이모의 죽음, 구가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길바닥에서 죽게 되는 비극 속에서도 소설은 사랑에서 비롯한 꿈, 희망이라는 주제에 잠깐이나마 빛을 비춘다. 그 빛은 구에게 드리워진 어둠의 길이에 비해 너무 짧다. 담이 붙잡지 않으면 꺼져버릴 듯 깜박인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보다 돈이 우위에 놓인 채, 온갖 비극이 난무한 세상 속에서 그 빛은 끝내 소멸하기를 거부한다. '오래된 백설기처럼 굳어가던' 구의 몸을 먹기까지, 담이가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도 구와 함께 그리던 희망의 점멸이지 않았을까. 꺼졌다 켜졌다 반복되는, 한 발짝 다가서면 잡힐 것 같은, 그 위태로운 신호를.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이토록 처절하게 몸부림칠 수 있는가. 작가의 괴물 같은 상상력을 마주하기 어렵다가, 구와 담의 삶을 담아낸 아름답고 감각적인 문장들에 빠져들다가, 단숨에 책을 다 읽고도 여운은 길게 남는 이야기. 구의 증명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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