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에밀 프랑클은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초의미’라 불렀습니다. 그 의미가 인지를 넘어선 데 있어 우리로서는 그 자리에서 파악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살아야 하는 이유’, p.137)
강상중의 책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고, 고통과 혼돈의 시간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이들을 내내 떠올렸다.이해할 수 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버텨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이다. 재일교포 2세이자 정치학자로 살아온 저자 강상중 역시 고통과 혼돈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도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일본 근대화 과정과 전후 일본 사회, 동북아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으로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던 석학이었다. 이 책의 전작 ‘고민하는 힘’이 그의 대표 저서이기도 하다.
‘살아야 하는 이유’. 책의 제목만 보아도 읽는 이의 마음 자세가 진지해진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장 절박하게 찾아야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저자 자신이었다. 강상중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3·11 일본 대지진 때문이었다. 신경증을 앓던 젊은 아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시기와 2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 도호쿠 지방의 지진은 불과 몇 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 빅토르 에밀 프랑클의 말처럼 인간의 인지로는 해석할 수 없는 ‘초의미’ 한 일들을 연달아 맞닥뜨린 것이다.
한편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애정, 건강, 노후가 보장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발명된 행복 방정식’의 한계를 지적한다. 대규모 재해와 후쿠시마 제1 원전 사고를 통해 그러한 ‘행복 방정식’에 매달리는 것이 어딘지 공허하고 허무하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p.26) 그는 이와 같은 공허와 허무를 딛고 일어서기 위한 방편이자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던진다. 총 9장으로 구성된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굵직한 인생 질문들이 실려 있다.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왜 이토록 고독한가’, ‘진짜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절망 앞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갈 근거를 찾아낼 수 있을까’. 질문의 무게에 비해 책의 분량은 200쪽 정도로 많지 않다. 결국 이 책은 생의 이유를 명확히 답해주는 해설서가 아닌, 각자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묻도록 돕는 안내서에 가깝다.
강상중 작가는 담담하고 친근한 어투로 누군가와 대화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책을 읽다 보면 학부 시절, 열의 넘치는 강의를 이끄셨던 철학 교수님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 학기 수업이 끝나서도 동서양 철학사와 학자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인생은 귀히 여길만한 가치 있는 것’이라는 울림이 종소리처럼 가득히 내 안에 울려 퍼졌다. 하늘 위를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보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올랐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나는 그런 것이 가장 궁금했던 아이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용을 이해해 보고자 애쓰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만큼 생의 본질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내게 중요한 질문이었다. 또한 책의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19~20세기를 살며 시대를 예견하고 통찰했던 석학들의 이야기가 어렵지만 흥미롭게 다가왔다.
결국 주어진 생을 의미 있게 잘 살아내려면 내가 누구인지, 자신의 자의식을 명확히 규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는 ‘진짜자기'를 찾는 일과 ‘자기실현’을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이거나 강박에 사로잡히는 현상을 우려한다. 인상적인 대목은 ‘진짜’나 ‘자기다움’을 탐구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은 1900년대 일본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의 대문호로 알려진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작품과 작품 속 인물들을 분석하면서 근대화 시대에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 문제, ‘나다움’을 찾는 일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한다.
소세키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의식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미궁이 되어 그 안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고를 많이 하는 지식인일수록 더 쉽게 그렇게 되어 버리는 희비극도 있습니다. 소세키의 소설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의미의 대사가 자주 나오는데, 이는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소세키는 근대라는 시대가 선택해 버린 그런 불행한 정신을 집요하게 그렸던 것입니다. (p.50)
저자는 근대 이후 인간의 자의식이 한없이 비대해진 까닭은 ‘자유’라는 것이 삶의 기본 원리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근대 이전과 이후, 가장 달라진 점은 신과의 관계인데 예전의 사람들은 신과 연결되어 일정한 질서로 형성된 세계의 일원이었고 근대 이후에는 종교에서 분리된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신에게서 분리된 인간은 타인과도 툭툭 분리되어 연결점이 없다. 그러면서 각자 내면적으로 망상이 비대해지고 대인관계는 더욱 신경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p.52) “자유와 독립과 자아로 가득 찬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런 외로움을 맛볼 수밖에 없네.”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 등장한다는 대사를 몇 번 곱씹었다.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뿐만 아니라 소세키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유대인 정신의학자로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토르 에밀 프랑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연구 내용을 함께 서술해 나간다.그는 이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이룬 학문적 성취가 공통적으로 같은 문제, 즉 근대라는 시대의 인간 고뇌와 그 의미를 탐구해 나간 것이라는 데주목한다.(p.59) 인류의 미래, 세계의 행방을 고민하는 일은 학자의 사명일까. 저자 강상중 역시 아픈 가족사를 딛고 이 책을 펴냈다는 점에서 그들과 나란한 길을 걸어 나온 듯하다.
... 자꾸 제 머리를 스치는 것은 ‘거듭나기(twice born)'라는 말입니다. ’ 거듭나기‘는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중요한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을 헤맬 정도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빠져나간 지경에 도달하고 세계의 새로운 가치라든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p.121)
강상중 작가는 섬처럼 외롭고 고독한 자아로 가득한 시대,윌리엄 제임스가 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사용된 ‘거듭나기(twice born)'라는 용어를 주의 깊게 음미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제임스는 중증의 신경병을 앓았고 소세키는 위궤양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갔으며, 프랑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 갇히며 부모와 형제, 아내를 잃었다. 그는 이들 모두 고통과 절망의 문을 지나며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이책에서 주목하는 '거듭나기'는 기독교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거듭남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의 '거듭나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써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선택은 각 개인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윌리엄 제임스가 말하는 '거듭나기'는 개인의 뜻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겪게 되는 과정이므로 기독교의 개념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보인다.
고통과 절망의 문은 가능한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와 저자의 견해처럼 그 문을 통과하며 자신이 속한 세계와 생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된다면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듭나기'를 생각하다 보니 6.25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겪은 나의 조부모가 떠올랐다. 이들에게는 전쟁 당시 초등학생 아들 세 명과 어린 딸 한 명이 있었는데 모두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날, 북한군의 공습을 피해 아들 셋과 딸 하나는 서로 다른 방공호에 숨었다. 그런데 아들들이 숨었던 곳이 그만 폭격을 맞고 말았다. 한 날 한시에 자식 셋이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전쟁 후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더 낳아 키웠다. 전후에 태어난 아들이 바로 나의 아버지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다듬어 집과 가구를 짓던 목수였다. 어릴 적 집 마당 한 편에는 할아버지의 목공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맡았던 톱밥 냄새는 지금까지 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손주들을 유쾌하게 대했고, 쉽게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가 전쟁을 겪으며 앓았을 마음의 병, 고통과 슬픔의 무게에 대해서는 미처 헤아려보지 못했다. 빈 터 위에 새 집을 짓듯 할아버지 역시 잿더미로 변한 자신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다시 지어 올려야 했으리라.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그분의 건실했던 삶의 태도를 존경한다. 격동의 세월을 살다 간 나의 조부모에게 생의 의미는, 또 행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제는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책을 읽으며 그들이 거쳐 온 시간의 궤적을 마음으로 그려볼 수 있어 감사했다.
책의 결말 부분에서 저자는 프랑클이 제시한 인간의 가치 세 가지를 언급한다. 인간의 진가를 드러낼 수 있는 가치가 창조성과 경험, 태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프랑클, 그리고 저자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태도’란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며, 그저 마음속으로 빌고 기도하고 생각하는 것이다.(p.175) 일과 연결 짓는다면 태도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에 방점을 두는 것,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치 있는 태도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찾기 위해 녹초가 될 때까지 스스로 괴롭히지 말라는 저자의 말이 담담하게 들렸지만 마음 깊은 곳까지 큰 위로로 가닿았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노력해도 안 된다는 허무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고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요.(p.191)
책은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함부로 비관하지도, 근거 없는 희망만을 외치지도 않는다. 대신 바쁜 일상에 쫓기느라 각자에게 주어진 생의 이유를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보도록 독려한다. 사람의 밑바탕은 그가 가진 기억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을 대하는 나의 태도임을 깨닫는다. 현재를 소중히 여길 것. 유한한 인생 안에서 유일한 당신과 좋은 기억을 쌓아갈 것. 책을 다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오늘을 사는 까닭을. 그리고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한 사람의 인생은 그가 지나온 시간의 궤적을 따라 고유한 무늬를 그려낸다고 믿는다.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훗날에 그 무늬가 자신을 말해줄 것이다. 삶이 평온하고 순탄할 때는 부드러운 곡선을, 반대로 고통과 혼돈 속에 있을 때는 작은 점 하나 간신히 찍혀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무늬가 그려지든 삶은 최선을 다해 살아갈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되새겨본다. 주어진 생을 다 살아내고서 언젠가 내 삶의 무늬 전체를 조감해 볼 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