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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May 23. 2024

백 년의 시간 읽기

읽는 마음 <최은영, '밝은 밤'>

소설은 매직미러 같은 존재이다.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면 그 안에 있는 작자가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 비춰지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p.150)


   

속 깊고 다정한 친구처럼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문장들이 있다. 그런 문장들은 나조차도 수수께끼처럼 여겨지는 내 마음을 대신하여 해독해 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된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줄곧 그런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소설 '밝은 밤' 뿐만 아니라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등 작가의 전작 소설에는 여성 인물들의 우정과 갈등, 내면의 상처와 아픔을 함께 보듬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나와 같은 여성의 이야기이기에 우선 끌리고, 작가가 누군가의 마음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한 문장들이 좋다. 그래서 나는 최은영 작가가 남들은 쉽게 보지 못하는, 마음 관찰을 참 잘하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인 '밝은 밤'은 사 대에 걸쳐 이어진 여성들의 서사를 주로 다룬다. 주인공 지연의 증조모 삼천이와 그녀의 친구 새비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이다. 수난 시절을 함께 하며 깊어진 이들의 우정 관계는 소설의 중심 서사를 이룬다. 삼천의 딸이자 지연의 할머니인 영옥은 새비의 딸인 희자와 어려서 친자매처럼 컸다. 하지만 전쟁 이후, 영옥은 결혼을 하고 희자는 대학을 진학하며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영옥의 남편 길남선은 중혼 사실을 숨긴 채 영옥과 결혼하고 딸이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처에게 가버린다. 영옥과 남선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지연의 엄마 미선이다. 내면의 상처와 고통이 큰 미선은 딸인 지연을 전적으로 지지해주지 못하고 자주 대립하며, 엄마 영옥과도 오랜 시간 연락을 끊은 채 살아간다.   


소설은 지연이 남편과 이혼 후, 희령이라는 작은 도시로 내려오며 시작한다.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p.9)



희령은 지연이 어렸을 때, 할머니와 소중한 추억을 쌓았던 곳이다. 열 살이었던 그녀는 희령에서 할머니와 맨 처음 은하수를 보았고, 사찰과 계곡, 바닷가를 거닐며 잊지 못할 여름을 보냈다. 하지만 폭설이 내리던 날, 어른이 되어 희령에 도착한 지연은 '마음의 보호대 같은 것이 부러진 기분'이었다.(p.12) 외도를 하고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 남편을 보며 그녀는 마음이 무너졌다.  



마음이라는 것을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p.14)



새 직장이 위치한 희령으로 거주지를 옮긴 지연은 두 동짜리 복도식 아파트에 살게 되고, 그곳에서 어느 멋쟁이 노인과 자주 마주친다. 자신과 엄마의 이름을 알고 있던 노인은 다름 아닌 지연의 외할머니였다. 할머니와 엄마는 수십 년간 서로 연락하지 않은 채 지냈기 때문에 지연 역시 십 대 이후에는 할머니와 왕래 없이 살아왔다. 지연은 할머니와 재회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이제 희령은 지연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의 지연을 다시 품어준 유년의 공간이자, 가족 사이 단절되었던 관계의 끈을 다시 이어준 이해의 공간이 된 것이다.  



어느 날 할머니는 지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사진 속에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여자 둘이 미소를 짓고 있다. 한 여자는 삼천이라 불렸던 지연의 증조모 이정선, 다른 여자는 증조모의 친구 새비였다. 할머니가 지연에게 이 사진을 보여 준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 삼천이를 무척 닮았기 때문이었다. 지연은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몰랐던 가족 이야기를 듣게 된다. 증조모가 증조부를 만난 이야기, 새비 부부와의 만남과 헤어짐, 피난 시절 인연을 맺게 된 명숙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소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지연의 시점으로 재구성한다. 실감 나는 개성 사투리와 섬세하고 감각적인 감정 묘사, 구체적인 배경 설정은 소설의 이야기가 마치 내 가족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한다.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 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 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식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p.47)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백정의 딸. 삼천이는 천주교도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며 개성으로 오게 된다. 그녀의 마음에는 홀로 죽어가는 엄마를 두고 떠나왔다는 죄책감이 늘 서려있다. 한편, 일본인에게 땅을 다 뺏기고 개성으로 쫓겨온 새비 부부는 증조모와 할머니의 삶에 큰 버팀목이 된다.



새비 아저씨는 증조부와 형제처럼 지내오던 사이였다. 목이 길고 키가 컸던, 항상 웃고 인자하던 그는 영옥에게 '해 같은 사람'(p.111)이었다. 삼천이가 집을 떠난 후, 그녀의 어머니를 돌보기도 했던 새비 아저씨는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들 중 유일하게, 타인에게 너그럽고 좋은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돈을 버는 동안 마음과 몸에 큰 병을 안고 돌아온다. 히로시마 폭격의 현장을 목격했던 그는 평생 믿어왔던 천주님께 불같이 항변하며 죽어간다. 전지전능한 천주님은 왜 손을 놓고 계신 거냐고. 나는 슬퍼만 하는 천주님께 속죄하고 싶지 않다고. (p.124) 전쟁의 참혹함을 극적으로 묘사한 이 대목은 새비가 남편의 요양을 위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후, 삼천이에게 쓴 편지에 실려있는데 소설 전체에서 내게 가장 가슴 아프고도 강렬한 장면으로 남았다.



새비네와 삼천이네 가족에게 전쟁의 비극은 계속되고 몇 년 간 헤어졌던 이들은 6.25 피난길, 대구의 명숙 할머니네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는 더 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길을 걷다보니 해가 졌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p.167)



당시 소녀였던 영옥은 피난길을 걸으며 지독한 겨울밤을 보낸다. 굶주림에 지쳐 따라붙는 아이, 아이를 데려가고픈 자신을 모질게 때리던 엄마. 얼어붙은 밤 길은 걸어도 걸어도 그녀에게 어떤 희망도, 기대도 체념하게 만들었다. 삼천이 가족이 피난길에 도착한 곳은 대구의 명숙 할머니네. 긴박하고 곤궁한 피난 상황 중에 한 줄기 빛은 이곳에서 조용히 새어 나왔다. 새비의 고모였던 명숙 할머니는 새비네 뿐만 아니라, 혈연관계가 없는 삼천이 가족 또한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었다. 겉으론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이는 명숙은 영옥에게 재봉틀로 옷을 수선하는 일을 가르쳐주었고, 영옥은 명숙에게 로빈슨 크루소 같은 소설책을 읽어준다. 훗날, 옷 짓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았던 영옥에게 명숙은 어려운 시절을 보살펴 준 은인이자 스승이 된다.  


        

할머니는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증조모도 매주 새비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썼고, 할머니가 월요일마다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쳤다. 우체부가 대구에서 온 편지를 가져다줄 때 얼마나 기뻤는지. 할머니는 새 편지의 냄새를 맡아보고는 희자가 쓴 글을 읽고 또 읽었다.(p.213)   



 소설 '밝은 밤'에 삽입된 편지 글은 큰 비중을 차지하며 독자의 몰입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장치가 된다. 낡은 상자 속에 시간 순으로 보관되어 있던 편지는 영옥이 지연에게 전달한 이야기가 진실임을 확증해 준다. 무엇보다 삼천과 새비, 영옥과 희자, 그리고 명숙 할머니의 편지는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던, 곡진한 기도처럼 느껴져 감동이 컸다.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p.220)       



남선이 떠나고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아온 영옥은 내면의 상처와 분노를 가린 채 사람들에게 냉소적이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누구보다 딸 미선에게 또 다른 상처로 남았을 것이고, 둘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 결정적 요인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영옥은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마음이 아팠고, 사랑을 느꼈다. 그래서 울 수 있었다. 그녀는 대구 가족(명숙 할머니와 새비, 희자)과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편지를 쓸 때만큼은 자신의 삶을 솔직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홀가분함을 느낀다. 지금은 손 편지를 쉽게 볼 수 없기에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을까. 쓰는 사람의 내면이 치유되기도, 상대방과의 오해와 갈등이 풀리며 멀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도 하는 편지의 힘을 새롭게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늘 그런 것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 말이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었으니까. 아무리 불안에 떤다고 해도, 좋은 순간을 그대로 누리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까.(p.199)



소설은 지연이 독일에서 학자로 살고 있는 희자를 수소문하여 영옥과 재회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지연은 이전보다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으로 희령을 떠난다. '밝은 밤'은 결국 백 년의 시간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지연이 자기 자신을 되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소설은 할머니 영옥의 입을 통해 지연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불안에 떨지 말고,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그대로 누리라고. 당신은 있는 그대로, 소중하다고. 그렇게 빛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다면 캄캄한 밤도 밝은 밤으로 보낼 수 있음을. 외롭고 고단한 생을 보냈던 할머니 영옥, 그리고 손녀 지연이 희령에서 함께했던 시간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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