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서점 문을 두드리면
걷는 마음(속초 '문우당서림')
속초에서 이틀간 여행하는 동안 내내 비가 왔다. 아침부터 하늘 가득 드리운 잿빛 구름은 온종일 기다려도 개일 것 같지 않았다. 자연스레 손가락은 '속초 실내 가볼 만한 곳'이라 두드리며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내 검색 결과에 속초 '서점 순례'라는 말과 지역 서점 사진이 노출되었다. '문우당서림'과 '동아서점'. 두 곳 모두 속초 시민뿐만 아니라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였다. 여건이 되면 두 곳 모두 발걸음 하여 순례의 여정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거세지는 빗발과 오후 일정 때문에 '문우당서림' 한 곳만 가기로 했다.
서점은 도로변에 위치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단독 건물에 넓은 주차장. 한눈에 봐도 동네 서점 규모를 뛰어넘었다. 건물은 서점이라고 쉽게 단정 짓기 어려워 보였다. 눈에 띈 서점 간판 로고는 '문우당'의 초성인 'ㅁㅇㄷ'으로만 디자인되어 있었다. 책이 자랑인 서점이라면 커다란 통창에 그것들을 잘 보이게 진열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았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창가. 그 너머는 어떤 공간으로 꾸며져 있을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서점의 인상이 꼭 속을 펼쳐봐야 내용을 알 수 있는 책을 닮았다. 옳거니, 그러보고니 건물 외관의 색은 연필의 흑심색, 종이책의 활자색을 하고 있구나. 첫 대면부터 초성퀴즈와 수수께끼 맞추는 기분을 만들어주는 공간이라니.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88 세계 올림픽이 열리기도 전인 84년도에 이 서점이 태어났다고 한다. 서점 입구에는 '백 년 가게'라고 쓰인, 작은 간판도 붙어있었다. 고객과 30년 이상 꾸준한 신뢰를 쌓은 가게들 앞에 붙는 인증이라고 한다. 그것은 40년 동안 한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 온 서점의 훈장처럼 보였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서점에게 절로 존경심이 생겼다. 당시에는 열 평 남짓한 동네 서점이었다는데. 이제는 각양각색의 책나무들을 드리운 울창한 숲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서점' 대신 '서림(書林)'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 때문인지 서점 안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하지만 붐비거나 소란스럽지 않았다. 곳곳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어 각자 책을 보며 조용한 분위기였다. 보통 이 정도 규모의 서점이라면 한쪽 공간에는 어김없이 카페가 있었을 텐데. 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더없이 충실한 곳이라는 감탄은 카페 대신 자리한 '작가의 방'을 발견하고서였다. 2층 한 편, 미닫이 문으로 된 방 안에는 한 작가의 생애가 담긴 약력과 그가 쓴 책들이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었다.
고요한 방은 작가 박완서의 방이었다. 미닫이 문 안으로 들어서니 아무도 없었다. 정갈하게 놓인 책 중에서 '나의 만년필'이라는 산문집을 골라 펼쳐보았다. 첫 글의 제목이 '사십 대의 비 오는 날'이었다. 그 순간, 웬일인지 이 방의 주인을 기다리는 기분을 느꼈다. 꼭 나와 같은, 사십 대의 그녀가 빗 속을 헤매다 미닫이 문 안으로 금방이라도 들어설 것 같았다. 시공간을 초월한 책 이야기가 당신과 나의 관계를 이어주고 좁혀주는군요. 그런 신비를 경험하자니 마음이 울컥했다. 서점 안 계단을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알지 못했던 까닭에 감동은 더 컸다. 아마도 이번 여행이 빼곡한 정보와 계획으로 채워졌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으리라.
속초에 오기 전, 날씨를 미리 체크해보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다. 여행 첫날, 설악산에 도착했는데 그때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학교를 빠지고 온 아이들을 위해 그래도 케이블카는 태워줘야지 싶어 표를 끊고 한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안개가 잔뜩 낀 설악산 풍경을 바라보며 결국 예매한 표를 취소하고 말았다. 산 아래로 내려와 가족사진을 찍고 빗방울이 맺힌 단풍나무 잎을 눈에 담았지만 아쉬움이 컸다. 그 순간, 왜 여행을 준비하면서 날씨 생각을 못했을까. 자책하는 마음과 함께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을 비껴서 속초에 머물렀다면 '실내 가볼 만한 곳'은 검색하지 않았겠지. 물론 서점 대신 바다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더라도 좋은 기억을 만들었겠지만. 물기 머금은 서점의 공기와 종이책. 그 사이를 걷던 마음의 감동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1층과 2층으로 나뉜 서점 내부는 책장이 온통 초콜릿색이었다. 천장과 벽면에는 책 속의 문장들이 초콜릿 조각 같은 얼굴로 반겨주었다. 이를테면, '나는 기쁨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싶어 하얀 돌멩이와 조가비에도 기쁨이란 단어를 적어서 책상에 놓아둔다.'같은 문장이.* '기쁨' 말고도 하얀 돌멩이와 조가비에 적어두고 싶은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가족, 웃음, 빗소리, 한적함, 젖은 나무, 산안개, 후회, 행복, 사랑...
찬란한 햇빛 속에 상상하던 가을 여행은 아니었지만 내가 마주한 모든 것들이 실은 반짝이며 가슴에 새길만한 여행의 장면을 만들고 있었다. 한 컷이라도 빠지면 섭섭할, 우리만의 가을 여행을.
한 시간은 더 되었을까. 서점 안에서 이렇게 오래 머물렀던 적이 얼마만인지. 다음 행선지로 떠날 때 즈음, 마음에 드는 책을 여러 권 골랐다. 사전 정보와 계획에 의존하지 않은 채, 그 순간 마음이 이끄는 대로. 고른 책을 다 읽고서 나는 어떤 마음이 들까. 또 다른 감동을 느낄까, 아니면 후회가 될까.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당장은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사는 기분이 좋았다.
이곳에서는 책을 사면 '오늘의 갈피'라는 책갈피를 고를 수 있다. 선택지는 열두 가지 정도인데 사실 이 갈피를 갖고 싶은 마음에 책을 여섯 권이나 구매했다.
'시간을 거닐며 기억에 새겨질 이 순간의 결.'
내가 고른 갈피에 쓰인 문장 하나. 정말 그랬다. 뜀박질하듯 쫓기던 일상을 벗어나, 시간 속을 천천히 거닐 수 있었던 여행. 내내 비가 오던 속초의 거리나, 그 비를 피해 두드렸던 서점 안에나. 우리가 찾던 가을은 어디에나 가득했다.
* '기다리는 행복' (이해인, 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