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길을 걷다 보면 자꾸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이 있다. 잎사귀는 다 떨어졌지만 조롱조롱 붉은 열매가 매달려있는 나무, 마른 나뭇가지에 포개지며 겹을 만들었다가 다시 바쁘게 움직이는 뭉게구름이 그렇다. 호숫가에 서서 갈대 무리도 한참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면 휘어지며 땅에 닿았다가 다시 반대쪽에서 바람이 불면 힘껏 일어서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런 풍경들 앞에서는 많이 걸어보자는 애초의 목표가 사라지고 만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호숫물 위로 반짝이던 잔물결, 윤슬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의 이름을 모른 채 살았다. 분명 내 주변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 중에는 '윤슬'이란 이름을 가진 이들도 있었을 텐데. 마냥 발음이 예쁜 이름이라고만 생각했지 본래 단어가 가진 뜻은 알지 못했다. 소설이었던가, 신문 칼럼이었던가. 어떤 글을 읽으며 윤슬의 뜻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햇빛이나 달빛이 물에 비치어 반짝이는 모습. 그것을 '윤슬'이라 부른다고.
코 끝이 얼얼할 정도로 추운 날씨였지만 한낮의 해는 의욕 넘치고 혈기 왕성한 예술가였다. 잔잔하던 호수의 물은 거대한 스크린이 되어주고. 어떤 이야기를 속삭이듯 물결은 끊임없이 일렁였다. 찬연한 빛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움직였다. 호수 위로 길게 뻗은 윤슬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한 방향으로 움직이던 그것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호수의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그 모습을 감춘 것이다. 저 반짝이는 것들은 윤슬이라고 한대. 이제 막 알게 된 이름을 누군가에게 소개해주지도 못했는데. 날씨는 맑았지만 바람이 거세었던 까닭에 물 위의 영화는 금세 끝나 버렸다.
'윤, 슬'이라 또렷이, 천천히 발음해 보았다. 입 안에서 바깥으로 작은 바람이 새어나갔다. 그 때, 과거의 나에서 현재의 나를 거쳐가며 내게서 조용히 사라진 무언가도 실감했다. 젊음의 한 때 맹렬히 쫓던 꿈, 그리운 얼굴들과 함께 피우던 웃음꽃, 시절 노래처럼 무언가를 미친 듯 좋아했던 마음 같은 것들. 언제든 현실에서 재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영원할 줄 알았던 것들, 그래서 소중히 여길 줄 몰랐던 것들이 윤슬처럼 반짝이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째서 아름다운 것은 현실과 시차를 두고 뒤늦게서야 발견되는 것일까. 사랑이나 행복, 감사와 같은 인생의 명장면들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알아챈다. 그런 게 사랑이었지. 그때 참 행복했는데.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 했어. 하며 한 발 늦게 깨닫곤 한다. 윤슬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지 못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느끼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순간들이 지금에서야 아쉽다. 인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멀리서 바라보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 반짝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그게 바로 아름다움의 속성이라는 사실도.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면 부끄러워 지우고픈 장면보다 나 스스로도 명장면이라 할만한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진실하게 살아간다면, 적어도 열 손가락 정도는 그런 장면들 꼽아볼 수 있지 않을까.
윤슬이 사라지는 동안에 새들은 허공 위로 날아올랐고 사람들은 드문드문 산책로를 오갔다. 내일도 맑은 날씨가 이어진다면 어김없이 윤슬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엔 아무에게라도 묻고 싶을 것 같다. 당신은 저 반짝이는 것들의 이름을 알고 있나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