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별다방을 찾는다. 집에서 카페 문 앞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십 오분쯤 될까. 나는 주로 차도 옆으로 쭉 뻗은, 직선형 인도를 걸었다. 짧다면 짧은 길이 내게는 보통 길게 느껴졌다. 쌩쌩 달리는 차를 보며 상대적으로 느린 나에게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일까. 매끈하고 넓기만 할 뿐, 인적도 볼거리도 없는 길 위에서 삭막함과 지루함이 몰려오곤 했다. 내가 써 놓은 글도 꼭 이런 길을 닮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나는 왜 자꾸 쓰려고 하는가. 정확히 알 수 없는 마음의 정체를 캐내고만 싶었다.
늦여름 즈음부터 다니는 길을 바꿔 보았다. 대로변 인도가 아닌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길로 걷기 시작했다. 길은 넓었다가도 좁아졌고, 제대로 포장되지 않아 울퉁불퉁한 길도 나왔다. 이전보다 카페에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길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길을 걷는 지루함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마음뿐. 그런데 이 작은 변화가 내게는 커다란 활력이 되었다. 그 활력은 아파트 단지 내 길목마다 마주치는 풍경들, 사람들이 내게 불어넣은 것이었다.
여름을 보내고 맞이한 가을은 걷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 코 끝에 청량하고 시린 가을 공기가 느껴지면 곧장 눈이 하늘로 향한다. 눈이 닿는 곳마다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한데 어찌 파랗게 보일 수 있나. 신비로운 빛의 산란에 마음이 맑아졌다. 세상을 감싸고 있는 가을 하늘이 거대하고 푸르른 포장지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온 지구가, 내가 걷고 있는 동네가, 마주치는 사람들이, 그리고 작디작은 나란 존재는 분명 선물이다. 하늘은 그 품에 감싸 안은 것들이 행여 찌그러지거나 부서질까 봐 저토록 멀리,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빛의 조각들은 하늘에서 퍼져 나아가다가 이내 나뭇잎 위로 떨어졌다.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실상 겹겹이 쌓인, 오랜 빛들의 소리가 아닐까. 가을빛으로 물든 낙엽을 산책 나온 어린아이들이 밟고 지나갔다. 둘, 셋 씩 짝을 지어 서로서로 꼭 움켜쥔 손이 단단해 보였다. 원래도 너희들 손은 따뜻할 텐데, 더 따뜻해졌겠다. 내 손은 늦가을로 접어들수록 차갑고 건조해지는 손인데. 그래서인지 부러운 마음으로 아이들끼리 맞잡은 손을 더 오래 바라보았다.
길을 걸을 때마다 마주치는 풍경과 그 풍경들이 빚어낸 소리는 내 마음 상자 안에도 차곡차곡 쌓인다. 그 상자가 다 채워질 때 즈음, 무언가 쓰고 싶은 마음 혹은 써야만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글을 쓰는 마음은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면서 어디론가 더 가보고 싶은 마음, 한편으론 갈 수 없는 마음과도 닿아있다.
읽고, 걷고, 쓰기. 이 세 가지 행위는 서로 나란하다. 트라이앵글의 세 꼭짓점처럼 균형을 이룬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어디론가 걷고 싶어지고, 걷는 마음은 가보지 못한 길을 탐색하는 마음으로 쓰게 한다. 쓰다가 고갈되고 지칠 때면, 다시 읽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책과 세상으로 나아가면 된다.
나는 잘 읽고, 잘 걷고, 잘 쓰고 있는가. 지금의 내 모습에 '그렇다'라고 확신할 순 없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삼박자 리듬 삼아 살고 싶다. 하루는 삶의 작은 마디. 그 마디를 건강히 자라 가게 하는 리듬. 그것이 나에게는 읽기와 걷기, 그리고 쓰기쯤 되지 않을까. 리듬이 있는 삶이란 참 생기있고 근사하게 들리는 말이다. 책을 읽으며 스르륵 종이 넘기는 소리, 길을 걸으며 자박자박 들리는 발자국 소리, 글을 쓰며 사각사각, 혹은 타닥타닥 문장이 만들어지는 소리. 이런 소리로 채워진 삶은 어떤 음악으로 완성될까.
카페에서 두어 시간, 글을 쓰고서 밖을 나섰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던 길과 부러 다른 길로 발을 내딛는다. 아파트 단지 뒷길로 빙 돌아 걷는 시간을 늘린다. 오래 걷는 만큼 보이는 풍경이 다채롭다. 하루가 다르게 더욱 알록달록 물들어가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게 중에는 여전히 초록빛을 띤, 아기손 같이 작은 단풍나뭇잎들도 있다. 아직 가을이 많이 남았다는 안도감 속에서 더 열심히 읽고 걸으며, 써야 할 이유가 내게도 있음을 발견한다. 아직 닿지 못한, 그러나 꿈꾸는 미래의 시간과 나 자신을 향해 더 가보고 싶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