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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Dec 14. 2023

쓰기, 내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일

쓰는 마음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 올 해가 보름 남짓 남았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잦게 내리는 비를 보면 다시 11월 즈음으로 돌아간 듯하고. 엄마, 눈은 언제 와? 12월이 되자 아이들은 매일 눈을 기다린다. 이제 겨울이 시작인 걸. 조급해져서 두 발도, 마음도 동동 구르는 아이들에게 안심하라고 이야기해 준다. 다가오는 주말, 날씨 예보는 다시 기온이 뚝 떨어진 내리막길을 걷는다. 따뜻했다 추워졌다를 반복하는 계절, 날씨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이 더 버거워진 것 같다.



그럼에도 일상의 균형이 깨지지 않고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가족들 면역 떨어지지 않도록 먹거리에 좀 더 신경 쓰고, 이왕이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돕는다. 얼마 전, 독감을 앓은 아이들도 아팠던 기억 때문인지 엄마 말에 고분고분. 아이스크림이나 냉수처럼 찬 것은 멀리하려고 노력한다. 이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일상을 일상답게 가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실한 것인지를.



한편으로 나라는 사람의 항상성은 어떻게 해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고민한다. 주변 상황과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나. 사람들의 시선 혹은 무관심에도 신경 쓰지 않는 나. 내가 지닌 장점이든 약점이든 고스란히 인정해 주고 스스로를 지지해 줄 수 있는 나. 이런 나를 꿈꾼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나에게 도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딘가에 부딪혀 깨져버린 유리 조각처럼 마음이 흩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내면이 단단해서 한결같은 사람. 너무 이상적인 욕심일까.



이러한 꿈이 부질없지만은 않다는 글쓰기를 하며 아가는 중이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 일은 호로록 국수면발 넘기듯 쉽지만 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글을 완결하고 나면 성취감이 뒤따른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지 않는 이상, 쓰는 일에 물질적 보상이 바로 주어지진 않는다. 흔히들 이야기한다. 글쓰기는 자기만족이라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신에 대하여 정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강력한 내면의 면역력을 가진 사람이다. 외부의 공격이나 변화에 흔들림 없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족히 여기는 사람. 내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사람이란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글쓰기로 나 자신과 일상 생활을 '만족'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신나는 체험이 있을까.



몇 달 동안 책 모임을 이어가는 중이다. 함께 읽고 쓰고 나누고. 내면의 면역력을 그 무엇에게도 빼앗기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생겼다. 사실, 모임을 시작할 때만 해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다. 대학 시절, 누군가와 팀을 이루어 과제를 해내는 일은 늘 부담감이 컸다. 졸업 이후, 취업 시험을 위해 들어갔던 스터디 모임에서도 매 번 불필요한 긴장을 하곤 했으니. 모임에 처음 나가던 날,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대한 염려가 어김없이 밀려왔다.



첫 모임의 어색함을 풀기 위해 나름 강구한 대책은 함께 커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 나는 모임 장소에 아메리카노 두 잔을 준비해 갔다. 모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근처 카페를 들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손에는 벤티 사이즈 커피 두 잔을 들고 쏟아질까 조심하며 걸었다. 낯선 길이라 조금 헤매는 사이, 상대방이 부담스러운 호의라 여길까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되기도 했다.



여러 개의 골목길을 들어섰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하자 모임 장소가 보였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두 분이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아랑곳없이 집에서 챙겨간 종이컵 두 개를 부스럭거리며 꺼냈다. 혼자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두 잔의 커피를 네 잔의 커피로 나누던 내게 동시에 쏟아진 눈길.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잘 알지 못하는 이가 건네는 커피에 대한 고마움과 부담스러움, 미안함이 삼 분의 일씩 섞여있던 눈길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때 다른 한 분이 들어서는 소리가 더해져 모임 분위기는 한층 누그러졌다. 우리는 커피를 홀짝홀짝 목 안으로 넘기며 모임의 방향과 규칙을 정했다. 얼마간 딱딱한 시간이 흘러가자, 점점 화기애애해졌다. 서로 성향도, 나이도, 쓰는 글의 색깔도 다른 이들과 이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처럼 대화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면 애써 들고 간 커피가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는 2주에 한 번씩, 지하철을 타고 모임 장소로 달려가는 길을 기대한다. 함께 글 쓰며 사귄 친구. 글벗이라는 말도 처음엔 낯설었지어느 사이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가 함께 모이는 공간은 모임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잘 가꾸어진 곳이었다. 단독 2층 건물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크고 작은 방들이 있고 한쪽 벽면에는 책들이 가득하다. 한 주는 함께 읽었던 책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 한 주는 각자 써서 온라인 카페에 올린 글을 합평한다. 그러고나면 두 시간이 금세 훌쩍 지나간다. 모임을 마무리하고 나오는 길에는 작은 텃밭이 가꾸어진 마당을 함께 둘러보는 여유가 생긴다. 맑은 날에는 노란 볕이 스며들어 마당 한가득 생기를 더했다. 혼자 띄엄띄엄 쓰다가 감춰놓았던 내 글에도 글벗들을 통해  생기가 더해진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상대방의 글이 어떤 면에서 반짝이는지, 또 어떤 면에서 다듬어야 할지 이야기하는 순간이 흥미롭다. 내 글이 타인의 눈과 마음을 통과하며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글은 혼자만 간직하고 있으면 일기로 남을 뿐이에요. 하지만 여러 사람과 나누면 날개를 다는 것 같아요."


이 모임을 맨 처음 제안해 주셨던, 우리 중 가장 먼 곳에서 달려오시는 글벗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내린 커피 한 잔을 집에서 홀로 마실 때, 가끔씩 그런 마음이 든다. 집 안 가득히 퍼진 커피 향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나는 예가체프 커피 원두에서 잘 구운 군고구마 향을 느끼는데, 다른 이는 어떻게 느낄지. 그런 것이 궁금하다. 여러 벗들과 글쓰기를 이어가는 한, 삶의 향기를 다채롭게 맡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개인의 경험과 생각은 고유한 영역이기에 그것을 표현한 글 역시 섣불리 평가할 수 없다. 대신 서로의 글을 음미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본다. 그러다 보면 타인과 나 자신 사이에 생기는 이해와 오해의 낙차도 차츰 줄어가지 않을까. 내면의 항상성을 유지하며 살기. 쓰기를 시작하며 품게 된 크고도 지극히 내밀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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