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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May 31. 2024

글쓰기의 지지대

쓰는 마음

젖은 수건은 스물다섯 개나 되었다. 네 가족이 며칠간 쓴 것을 모아 빨래한 후에 세어보니 그렇다. 앞 베란다에는 얼마 전, 반값을 주고 산 3단 건조대가 있다. 이전에 썼던 건조대 역시 3단이었는데 몇 년 사용했더니 가늘고 긴 스테인리스 막대가 젖은 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빠지기 일쑤였다. 아침 햇빛에 빨래 널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새 건조대를 구입해야만 했다. 요즘은 빨래 건조대를 찾는 사람이 줄어서 그런지 가격이 크게 내려갔다. 새로 조립한 건조대에 마음껏 젖은 수건을 널었다. 이전에 쓰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하다.



오월의 햇살은 베란다 깊숙이 스며들었고 빨래 너는 마음도 말할 수 없이 가벼워진다. 새 빨래 건조대는 살림하는 마음에 적잖은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사소한 살림 하나가 일상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날마다 반복되는 집안일에 몸과 마음이 처지지 않도록.



글쓰기에도 이런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요즘의 내겐 집을 나서서 카페로 향하는 일이 그런 장치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글을 꼭 써야만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이 결과적으로 뜻밖의 보람과 기쁨을 불러일으킨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많은 글들을 카페에서 썼던 것이다.  



쓰는 마음을 붙잡아두는 일은 좀체 수월해지지 않는다. 어제는 글쓰기로 설레던 마음이 다음 날 아침이면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무언가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력감, 목표한 일들을 희미하게 만드는 게으름은 '쓰고 싶은 마음'보다 힘이 세다. 하루 단위로 내 안에서 자리다툼을 하는 여러 마음에 스스로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쓰고 싶은 마음만큼은 아침이면 베란다로 날아드는 새처럼 내게 찾아온다. 이 마음이 조금 더 길게 머물 수 있도록 나는 동네 카페로 향한다. '일주일에 한 편 글쓰기'보다는 '노트북을 들고 무조건 카페 가기'를 일상의 작은 목표로 삼는 것이 마음도 몸도 가볍게 한다.



사실, 카페에 왔다고 해서 글이 술술 써지는 것은 아니다. 노트북을 켜고 자판을 두드리기까지 대개는 예열 시간이 필요하다. 쓰는 마음으로 몰입하기 위해서는 커피 한 잔, 타인의 글도 한 모금쯤 마셔야 한다. 오늘도 검은 빵모자, 초록 앞치마를 단정히 입은 바리스타와 마주 보고 선다. 커피를 주문하는 동안 쓰는 마음도 크게 부풀려본다. 그는 알까.  "따뜻한 블론드 아메리카노, tall 사이즈 한 잔 주세요."라는 주문의 말은 내게 "이곳에서 머물며 글 쓰기를 원해요."라는 의미인 걸.



카페에 앉아 글을 쓰면서도 널찍한 테이블 사이로 바쁘게 오가는 바리스타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일에 대해 보이는 만큼 헤아려본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주문받은 음료를 만들고 쌓여가는 음료 컵과 접시, 쟁반을 수시로 비우고. 그러면서도 한 명, 한 명 찾아오는 고객을 바라보며 환영하는 표정과 말씨를 잊지 않고. 반복된 행위들로 점철된 일터에서 변함없이 환한 얼굴과 목소리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 역시 날마다 마음을 다잡는 순간들이 있겠지. 음료를 만드는 마음, 낯선 타인을 대하는 마음, 카페 안을 정리하고 정돈하는 마음을. 내가 쓰는 마음을 붙잡아두려는 것처럼.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oo고객님!"

"음료가 뜨겁습니다. 조심하세요."



비슷한 멘트들이 벌써 여러 번이나 카페 구석에 자리 잡은 내게까지 또렷하게 들려온다. 사실, 이곳의 바리스타들은 성우처럼 음색이 좋아 가만히 듣게 된다. 목소리로 뽑힌 분들 아니냐며 혼자 좋아하는 중. 이제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만큼 귀에 익숙하고 편안한 소리다. 어쩌면 자신의 고객이 단 몇 분이라도 편히 머물길 바라는, 선하고 아름다운 진심이  마음에 닿는 거라 믿는다. 그것이 알맹이 없는 빈 말이라면 어떤 무게도 싣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져버리겠지.



내가 쓴 글에도 어떤 진심이 오롯이 담길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마음을 놓칠세라 곧바로 글을 써본다. 단어로, 문장으로 이어진 내 마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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