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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Aug 18. 2023

누군가의 뒷모습을 봐준다는 것

걷는 마음

살갗을 델듯한 햇볕이 온종일 내리쬐고 있었다. 이미 불처럼 번진 더위 탓에 한낮의 거리는 한산했지만 종종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모자만으로는 부족해 자외선을 막는 양산까지 들고서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려 안간힘을 썼다. 폭염에 지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곤 한 가지 생각을 머릿속으로 애써 끌어당겼다.



바로 밤 산책. 요즘의 내가 마음의 우물에서 열심히 길어 올리는 단어이다.



해가 저물고, 사위가 어둑해야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렸다가 집 앞 공원으로 향했다. 양팔을 힘껏 흔들며 한 방향으로 걷는 이들이 보였다. 이렇게 걸을 수 있는 밤을 모두들 나처럼 손꼽아 기다렸을까. 스쳐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이 노란빛 공원 조명 아래서 생기로 가득했다.



얼마 전, 공원 안에는 '맨발 힐링로'라는 새로운 길이 생겼다. 호수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신을 벗고 걸을 수 있도록 새 단장한 것이다. 이전에도 나와 아이들이 좋아하던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다 보면 늪처럼 보이는 작은 웅덩이를 만나곤 했다. 그 둘레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고, 어디선가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던 곳. 가을에는 수북이 쌓인 낙엽만으로도, 겨울에는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얼어붙은 웅덩이 안으로 던지는 것만으로도 그곳에서 한참을 놀 수 있었다.



우리가 '늪'이라 부르던 웅덩이는 맨발길이 생기면서 없어졌다. 당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무얼 해야 할지 막막해 쓸쓸하고 시렸던 마음들이 떠올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웅덩이 같던 그때의 마음들까지 이제는 늪과 함께 깨끗이 사라진 듯하다. 대신 우리의 작은 추억이 검은 밤 위에 새겨져 있었다.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투명한 무늬로.



새뜻한 밤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벌써 맨발길을 한 바퀴 돌고 온 이들이 삼삼오오 수돗가에서 발을 씻고 있었다. 조용하던 공원 안이 콸콸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물기 닦을 수건을 챙겨 오지 않은 나는 맨발 길 입구를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작은 아이가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아빠, 우리도 이 길 걷자!"



이렇게 외치고는 아이는 샌들을 벗어 다른 신발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선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맨발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게 아닌가. 작은 몸집에 가느다란 두 다리. 꼭 새 한 마리가 총총총 걸어가는 듯했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워 보이던지. 비슷한 신발을 신고 있던 남편과 큰 아이도 금세 맨발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벌써 저만치 떨어진 세 사람을 그저 바라볼 수만은 없지. 나도 운동화에 양말을 벗어버리곤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길바닥을 맨발로 걷는 일.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두려움이 많은 성격 탓에 아이였을 때도 대문 밖으로는 꼭 신발을 신어야만 안심이 되었을 테지. 그때도 안 해본 행동을 지금에 와서 시도할 수 있는 용기는 여름밤의 선물일까. 만일 혼자였다면 쑥스러워 맨발 길을 지나쳤을 것이다. 나와 함께 걸어줄 이들이 없었더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이다.



길의 표면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보기에는 촉촉하고 매끄러운 흙길인 줄 알았는데 속았다. 오돌토돌한 자갈이 밟힐 때마다 '아얏!' 소리가 절로 나왔다. 평온한 얼굴로 한 바퀴를 돌고는 발을 씻던 이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남편도 '끄응' 소리를 내며 겨우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발바닥이 아픈 느낌은 무뎌지고 걸을만해졌다. 몇 번의 고행을 더 거치면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려나. 신기한 것은 아이들만큼은 맨발길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일이었다.



나이가 가장 어린 작은 아이가 맨발 길에서는 줄곧 앞장을 서며 대장 노릇을 했다. 그 뒤에 큰 아이와 남편이, 마지막으로 내가 꽁무니를 졸졸 쫓았다. 그러느라 나는 자연스레 이들의 뒷모습만 보며 걸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는 일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여행지처럼 기억하고 싶은 공간에서는 특히 그렇다. 주변 풍경을 사진 찍느라 일행에서 주로 뒤쳐지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앞서 걷는 이들의 뒷모습도 함께 카메라에 담곤 다. 나중에 그렇게 찍은 뒷모습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더 좋아지곤 했다. 누군가의 뒷모습 사진이 앞모습 사진 못지않게 나는 애정이 간다.



자신은 직접 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 그것이 사람의 뒷모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뒷모습'같은 영역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그러니 평생을 살아도 나 자신에 대해 백 프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일 같다. 그 또는 그녀가 끝내 자신을 확신하지 못해 불안해할 때마다 예쁘다, 멋있다, 괜찮다, 잘한다 힘을 북돋아주는 일. 이런 일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뒷모습을 제대로 봐주는 것이지 않을까.


  

맨발 길을 걸으며 어김없이 가족들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밤하늘에 뜬 보름달이 조명처럼 밝았다. 달빛이 멀어져 가는 아이들과 남편의 등 위로 소리 없이 떨어졌다. 그 은은한 빛이 맨발로 걷는 나의 걸음을 이끌어주었다. 멈추지 않고 끝까지 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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