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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Apr 13. 2024

마음의 봄을 바라며

읽는 마음 (조해진 '겨울을 지나가다')

세상에 둘도 없는 한 사람,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예상치 못한 여러 감정과 기억을 파생시킨다. 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는 엄마의 죽음을 겪은 딸이 맞닥뜨린 거대한 슬픔과 죄책감, 미움과 회한의 감정을 길고 긴 터널을 지나가듯 통과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내 미래를 근심하느라 엄마가 직면한 현재의 불안과 고통을 자꾸만 잊는 내가 싫었고 징그러웠지만, 그렇다고 제어되는 것은 없었다. 서울의 병실에서든 J읍에서든, 엄마를 만나고 돌아가면 시간을 폭식한 듯 갑자기 너무 늙어버린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p.68)



영상 편집 기사로 일하던 정연은 췌장암 선고를 받은 엄마와 힘든 시간을 보낸다. 동생 미연은 가정과 아이들이 있고, 어릴 때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는 연락이 끊긴 채로 살고 있다. 정연은 결국 일을 정리하고 엄마의 마지막 두 달을 함께 하기로 한다. 하지만 막상 혼수상태에 빠진 채로 임종한 엄마를 바라보며 그녀는 아무것도 실감할 수 없었다.(p.29) 정해진 형식과 절차에 따라 장례식을 마친 후 정연은 J읍, 엄마가 살던 집에 머물며 홀로 엄마와 자신을 위한 애도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한 사람의 부재로 쌓여가는 마음이 집이 된다면 그 집의 내부는 너무도 많은 방과 복잡한 복도와 수많은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리라. 수납공간마다 물건들이 가득하고 물건들 사이 거울은 폐허의 땅을 형상화한 것 같은 먼지로 얼룩진 곳, 암담하도록 캄캄한 곳과 폭력적일 만큼 환한 곳이 섞여 있고 창밖의 풍경엔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그런 집…….(p.19~20)



사랑과 미움,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작가는 한 사람을 향한 이중적인 감정과 복합적인 기억을 빛과 어둠,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의 풍경이 혼재된 집으로 묘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과 과거의 시간 속에 봉인된 기억을 끄집어내어 영화 속 장면처럼 재현해 내는 작가의 필력은 잠잠했던 내 마음을 휘저어놓았고, 고속 열차처럼 과거의 기억 어디론가로 순식간에 데려다 놓곤 했다.  



존재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차에 도달할 터였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이번 겨울에 나는 그것을 배웠다.

슬픔이 만들어지는 계절을 지나가면서,

슬픔으로 짜여졌지만 정작 그 슬픔이 결핍된 옷을 입은 채, 그리고 그 결핍이 이번 슬픔의 필연적인 정체성이란 걸 가까스로 깨달으며……. (p.132~133)



소설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연이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해 가는 과정이었다. 정연과 동생 미연은 엄마의 유골을 납골당 대신 집 앞마당의 모과나무 아래 일부 묻기로 한다. 땅을 파내고 방수포에 골분과 흙이 섞이지 않도록 쓸어내는 미연의 모습, 봉분 앞에서 엄마를 떠올리는 정연의 마음이 실제 상황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사람의 몸도 죽으면 자연의 일부가 되기 마련일 것이다. 하지만 육체와 분리된 영혼은 눈과 얼음이 기화한 상태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살아있는 이들 곁에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그런 희망을 내포하고 있는 애도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연은 겨울의 세 절기인 동지와 대한, 우수를 보내며 엄마의 공간(집, 칼국수 식당)과 물건(털신, 스웨터, 도마와 칼), 그리고 엄마를 기억하는 주변 이웃들을 통해 ‘부재하면서 존재하는’(p.132)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배워간다. 여러 이웃들 중에서 정연과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인물은 목공소 주인 영준이다. 나무의 순한 냄새가 배어있던 목공소는 어떤 야심도, 독성도 없는 공간이다.(P.63) 그 안에서 정연은 영준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J읍에 내려온 연유를 알게 된다.



한편, 임대 아파트 퇴거 명령 조치로 이른 죽음을 선택한 다현의 이야기는 식모살이를 하며 주인집 맏딸에게서 모멸감을 느꼈던 정연 엄마의 소녀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소설 속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일과 사회생활, 연인과의 관계 속에서 정연 역시 여러 상처를 안고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연은 영준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난 다현과 엄마의 젊은 시절, 그리고 자신이 겪은 아픔을 함께 보듬어보게 된다.  장례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정연은 겨울의 마지막 절기인 우수 무렵, 엄마의 식당에서 칼국수를 직접 만들어보며 손님을 받기까지 한다. 타인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은 또 다른 누군가를 살피고 자신의 곁을 내어주겠다는 신호이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일어서고 회복해 나아간다. 정연은 이웃 노파나 영준에게 칼국수를 대접하며 엄마의 삶과 흔적을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따라가 본다. 그래서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마음과 행동까지도 헤아려본다. 그리고 영준과 함께 2월의 어느 날에 태어난 다현을 추모하며 비로소 자신의 엄마도 온전히 보낼 수 있게 된다.  



현실이라는 프레임 바깥에서, 사부작사부작, 키도 작고 손도 작은 두 사람이 저만치서 걸어가고 있었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내 쪽도 좀 봐달라고 전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그들의 길을 갈 터였다.(p.127)




이야기 곳곳에는 정연이 머물던 주변의 자연환경과 계절의 변화를 묘사하는 장면도 자주 등장한다. 이와 같은 배경 또한 정연의 슬픔과 불안을 위로하는 주요 장치가 된다. 산과 구름, 새들의 울음소리나 물소리를 통해 정연은 외롭지만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p.48)  



J읍의 호수와 천을 오가는 동안 수분을 흠뻑 흡수하여 몸집을 크게 부풀린 바람이 새벽 무렵엔 그 일부가 안개로 변형될 터였다.(p.98)



바람이 안개가 되고 다시 바람으로 순환하듯 정연이 느끼는 일련의 감정 역시 짙어지고 사라짐을 반복할 것이다. 슬픔과 불안도 반복하다 보면 숨을 쉬듯 언젠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소설은 이와 같은 질문에 잔잔하고도 따뜻한 위로와 함께 희망적으로 답한다.

 


집으로 걸어가는데 바람 끝에 둥글고 나른한 온기가 배어 있는 게 느껴지긴 했다. 겨울에서 봄 사이의 국경을 지나가는 기차 안의 승객이 된 것만 같았다. 기차는 느리게, 그러나 쉬는 일 없이 규칙적으로 달릴 것이고 겨울나무와 봄 나무가 섞여 있는 기차 창 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주머니 안을 뒤적이면…….

시곗바늘은 없지만 타이머는 내장된, 그러나 그 타이머가 언제 멈추는지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시계가 내 손에 딸려 나올 터였다.(p.131)



이 소설은 정연이 지나온 길고 추운 겨울처럼 힘들고 괴로운 시간의 터널을 통과 중인 이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삶에 찾아드는 시련과 고통을 완벽히 통제하며 사는 이들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소설은 어떠한 고통과 아픔일지라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라고 말해준다. 그렇게 겨울을 지나는 동안 우리의 마음도 동지와 대한, 우수를 거쳐 다시 봄을 맞이할 것이라고.


당신과 나의 계절도 봄이길. 마침내 봄 같은 마음을 피워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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