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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Apr 24. 2024

나를 지켜주는 힘은

읽는 마음(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소세키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의식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미궁이 되어 그 안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고를 많이 하는 지식인일수록 더 쉽게 그렇게 되어 버리는 희비극도 있습니다. 소세키의 소설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의미의 대사가 자주 나오는데, 이는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소세키는 근대라는 시대가 선택해 버린 그런 불행한 정신을 집요하게 그렸던 것입니다.
<강상중, '살아야 하는 이유', p.50>


작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연초에 읽었던 책 '살아야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책의 작가 강상중은 소세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자의식의 감옥에 갇혀 있다'라고 표현한다. 자기 자신이 미궁이 되어 그 안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빠르게 변화해 가던 시기, 당시의 사람들은 실제로 무엇 때문에 헤매었을까. 소세키의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가 살았던 백 년 전에도 보통의 사람들은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써 고민했다는 사실이 내게 공감과 위안이 되었다.            



일본의 국민 작가답게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번역본으로 출간되어 있었다. '도련님'은 소세키가 1906년에 발표한 중편 소설로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읽힌 이야기라고 한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는 작품 속에 여러 인간 군상을 등장시켜 재밌고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코믹 액션 영화에서 볼 법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웃기다. 백 년 전에 쓰인 고전소설이라 해서 난해하고 딱딱할 것이라는 편견이 와르르 무너졌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천성이 워낙 막무가내인지라 손해만 보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 학교 건물 2층에서 뛰어내려서 허리를 삔 적이 있다. 왜 2층에서 뛰어내렸는지 묻는다면 별달리 할 말은 없다. 새로 지은 건물 2층에서 고개를 쭉 빼고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때 마침 운동장을 지나가던 같은 반 녀석이 날 보고는 대뜸 이러는 거다.

  "거기서 뛰어내릴 용기는 없을걸? 이 겁쟁이야."

  그래서 그냥 뛰어내렸다. (p.9)



주인공 '나'는 하인이자 할머니 뻘되는 기요에게 '도련님'이라 불린다. 결혼이나 직장 생활 전에다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그는 말썽을 자주 부려 부모나 형에게 무시당하고 대우받지 못한다. 하지만 기요만큼은 그를 대쪽같이 곧은 성품이라며 무조건 칭찬하고 아낌없이 사랑해 준다. 사실 그는 어려서도 겁쟁이라 놀리는 친구의 말에 2층에서 뛰어내릴 만큼 무모했다. 어쩌면 자신을 마음대로 판단해 버리는 타인의 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예민한 기질의 사람인 듯하다. 앞뒤 따지지 않고 2층에서 곧장 뛰어내리다니. 소설의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고 황당하다. 주인공은 그저 겁쟁이가 아님을 증명했을 뿐인데 실제로는 거의 찾기 힘든 캐릭터였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남다른 기질을 보였던 주인공은 도쿄를 떠나 '괭이 마빡만한 동네'(p.27) 시코쿠의 중학교 수학 교사로 가게 된다. 소설의 주요 사건은 이 작은 시골의 중학교에서 만난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스스로 비겁하거나 겁쟁이는 아니지만 '담력이 약하다'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짓궂은 학생들은 끊임없이 장난을 친다. 낯선 동네와 사회생활에 나름 적응해 보려 온천을 찾고 당고와 튀김 국수를 먹었을 뿐인데 학생들은 대놓고 '나'를 놀려댄다. 메뚜기 수십 마리를 이불속에 잡아넣어 자신을 골탕먹이고도 오리발을 내미는 학생들 앞에서 '나'는 계속 당하기만 하니 속에서 열불이 난다.   



한 건 한 것이고 안 한 건 안 한 것이다. 나란 놈은 장난을 쳤어도 거리낄 게 없다. 거짓말을 해서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을 하지 말 일이다.... 돈은 빌리면서 갚아야 될 땐 오리말 내미는 비열한 짓들은 모두 이런 녀석들이 어릴 적 버릇 못 버리고 자라서 하는 짓거리다. 도대체 학교에 와서 뭘 배우는 거야, 저런 녀석들은! 기껏 학교에 와서 거짓말이나 하고, 사람을 속여먹고, 다른 사람 뒤에 숨어서 욕이나 하고, 이따위 장난질이나 하는데.(p.63)



'나'는 학교라는 낯선 사회에서 처음 만난 동료 교사들에게도 삐딱한 자세로 경계심을 풀지 못한다. 특이한 장면은 주인공이 관계를 맺게 되는 주변 인물들의 이미지나 행동에 따라 별명을 짓는다는 것이다. 훌륭한 말만 할 뿐 학생들의 잘못 하나 바로잡지 못하는 교장 '너구리', 겉으로는 교양 있어 보이지만 실은 교활하고 비열한 인간, 교감 선생 '빨간 셔츠', 교감 선생 밑에서 아부하는 미술 선생 '떠버리', 교감 선생에게 결혼 상대를 뺏기고 전근까지 가게 되는 성인군자 '끝물 호박', 하숙집 주인 말만 듣고 '나'와 갈등하다가 결국 '빨간 셔츠' 타도 계획을 성공시키는 수학 선생 '거센 바람'. 이렇게 주인공이 주변 인물들에게 별명을 지어주는 행위는 타인의 인간 됨됨이를 파악해 가고 그들과 좋든 싫든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세상살이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나'로 인해 별명을 얻게 된 이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유의미한 존재가 되어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



학창 시절, 좋아하는 어른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어른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선생님들 중에서 그런 어른들에게는 장난스러운 별명을 붙여 부르며 작은 복수라도 한 것처럼 통쾌함을 느꼈던 일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임에도 미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한 이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 역시 '나는 옳고 당신은 그르다'는 식의 고집스러운 자의식이 크게 부풀어져 있던 탓이 컸다. 그렇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뻗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를 받았던 청소년기이기도 했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도 강해서 나를 좋게 봐주거나 칭찬해 주는 선생님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며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기도 했던 것 같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였다. 소설 '도련님'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접하며 이미 멀리 지나온 학창 시절을 새롭게 떠올려보았다. 별명을 지어 부를 만큼 이미지가 강했던 선생님들의 표정이나 말투, 목소리까지. 기억하려 애쓴 적이 없는데 지금도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것을 보니 그들이 내게 끼친 영향이 알게 모르게 컸구나 싶다.  



1년이나 이렇게 당한다면 나쁘고 나쁘지 않고를 떠나, 나도 녀석들처럼 하지 않으면 결판을 낼 수 없다. 아무래도 빨리 도쿄로 돌아가서 기요랑 사는 게 좋겠다. 이런 동네에서 사는 것은 타락을 재촉하는 짓이다. 신문 배달을 하는 것이 타락하는 것보다 낫다.(p.168)



'나'는 겉보기엔 그럴듯한 교사가 되었지만 시코쿠에서 사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숙주인의 거짓말로 쫓겨나기도 하고 '빨간 셔츠'와 '떠버리'는 자신을 뒷담화한다. 교장 '너구리'는 학생들의 싸움을 말리다가 다치기까지 '나'와 '거센 바람' 편에서 신문사에 정정 보도 하나 제대로 요구하지 못한다. 사건과 사고의 연속인 시코쿠는 주인공에게 새로운 세상, 그리운 기요와 함께 사는 삶을 더욱 동경하게 만든다.



소설은 내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주로 타인의 말과 행동에 대해 느끼는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에 주력한다. 화자의 말과 마음은 시종일관 타인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날이 서 있다. 작가는 정제되지 않은 인간 내면의 심리를 날 것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꾸밈없고 거친 문체를 택한 듯하다. 독자로서는 주인공의 거침없는 심리를 그대로 마주해야 하기에 마음이 불편하고 어려워지기도 했다. 마치 피부 위로 올라온 울퉁불퉁한 요철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쉽게 손을 대지도, 그렇다고 눈감고 못 본 척 할 수도 없는 현실. 자신만의 아집으로 똘똘 뭉쳐있던 주인공은 시코쿠의 교사 생활을 겪으며 불안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강상중 작가가 이야기했던, '자의식의 감옥'에서 헤매던 주인공은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어떤 선택과 행동을 취할 것인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결말이 궁금해졌다.



그날 밤 나와 거센 바람은 이 더러운 동네를 떠났다. 배가 뭍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기분은 좋아졌다. 고베에서 도쿄까지는 직행으로 와서, 신바시에 도착했을 때는 드디어 속세에 나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센 바람과는 그 길로 헤어져서 지금껏 얼굴 볼 기회가 없었다.(p.205) 



그런데 소설의 끝에 다다를 즈음에는 예상치 못한 커다란 감동이 먹먹하게 밀려온다. 세상 물정 모르던 '도련님'을 지켜준 것은 스스로 짜낸, 계산된 지혜가 아니었다. '빨간 셔츠'처럼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날뛰는 세상에서도 '거센 바람'처럼 자신의 이익보다 정의에 목숨 거는 순수한 사람, '기요 할머니'처럼 자신만 바라보며 지지해 주는 사람이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든지 주인공 '나'의 세상은 결국 정의와 사랑이 이기고 마는 세상이다. 불완전하고 막돼먹은 인간 군상들로 어지럽고 혼탁했던 시코쿠를 떠나 주인공은 기요와 함께 살게 된다.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보내주던 사랑과 응원에 힘입어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여관에 숨어 잠복하면서 비열함의 끝판왕 '빨간 셔츠'를 응징하는 결말도 조금은 뻔하지만 순전하게 통쾌했다. 인간의 품위란 어디서 나오는지 명백히 그려준 이야기여서. 온갖 편법과 비리가 판치는 세상에서도 끝내 '인간다움'을 지키려 애쓰는 이들이여, 희망을 가지시라. 소설은 시원스럽고 힘있게 외친다. 나쓰메 소세키는 미리 알았을까. 백 년이 지난, 먼 미래의 사람들 역시 여전히 정의와 사랑에 목말라할 것이라고. 그러니까 시코쿠를 과감히 떠난 주인공처럼 현실을 떠나 고요히 안착할 수 있는 나만의 세상이 필요할 것이라고. 그래서 소설이 읽히고 쓰이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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