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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Aug 18. 2024

시간을 담는다

장마가 끝날 무렵 강원도 삼척으로 휴가를 갔다. 그런데 삼척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컹컹.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아이의 기침이 심해지니 마음속에 여러 걱정들이 휘돌며 결국 물음표를 만들었다. '아이가 밤새 끙끙 앓으면 어떡하지?', '백일해나 폐렴이면?',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여기서 무얼 먹여야 해?'. 내 마음에는 순식간에 불안의 물음표가 덕지덕지 붙으며 얼룩이 졌다.



휴가 이튿날 삼척 시내로 나가 소아과부터 찾았다. 숙소에서 30분 이상을 차로 달려야 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먼저 찾은 소아과는 실제 와보니 휴가 기간으로 문을 닫았고. 다시 다른 소아과를 찾아 들어갔다. 접수를 하고 기다리는 동안 작은 아이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는 유독 코로나 검사를 무서워한다. 검사는 안 할 거라고 해도, "그래도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어떡해?" 반복해서 말하며 계속 두려워한다.   


"숨을 쉬어보세요."


"후우. 후우-."


"옳지, 너 참 잘한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의 가슴과 등에 청진기를 대었고, 아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시키는 대로 숨을 내쉬었다. 코로나 검사만 아니면 뭐든 다 괜찮다는 아이는 선생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도 집중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숨소리가 나쁘진 않아요. 우선 삼 일치 약 처방해 드릴게요. 그래도 여기까지 놀러 오셨는데. 삼척은 물놀이 말고는 할 게 없어서요. 허허. 무리하지 말고 놀아. 알았지?"


"네!"



아이는 짧게 대답했지만 일순간 긴장이 풀리며 표정이 환해졌다. 무언가 설명할 때면 눈을 지그시 감던 의사 선생님 말이 끝나자 나 역시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무리하지 말고 놀기. 선생님 말의 핵심은 아이에게도, 내게도 필요한 말이었다. 여행은 느슨해져야 했다. 아이의 컨디션에 맞추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좇느라 조급했던 나를 위해서도. 많은 것들을 경험하느라 숨 가쁜 여행 대신 일정을 줄이고 숨을 고를 수 있는 여행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 같다.  



돌아보면 계획대로 흘러간 여행은 거의 없었다. 날씨와 아이들의 컨디션, 집과 다른 낯선 환경, 상황과 기분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서로의 마음.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운다 해도 실제 여행에선 이런 요인들이 더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이가 걸음마를 뗀 후로는 거의 매년, 장소만 바꾸어 여름휴가를 갔다. 다녀와서는 잊지 않고 여행 사진첩을 만들었는데 어느덧 두꺼운 앨범이 네 개나 생겼다. 사진은 시간을 담는 그릇.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모은 여행의 장면들이 쌓여 우리 가족 고유의 역사로 기록되었다.



진료를 보고 나오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남편이 지도상으로 근처 수제 돈가스 집을 찾았는데, 병원 오는 길에 내 눈에 들어왔던 식당이기도 했다. 발걸음을 옮겨 식당으로 향했다. 이전 날 밤에는 비가 내렸음에도 한낮의 시내 거리는 뙤약볕으로 뜨거웠다. 그러고 보니 휴가를 떠난 날은 일 년 중 가장 더운 때라는 대서(大暑). 어느새 여름의 한가운데까지 왔구나. 삼척의 낯선 동네를 걷는 데 내리막길 끝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모여있었고 그 너머 흰 뭉게구름과 파란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아!' 눈부시게 아름다워 감탄이 흘러나왔다. 눈앞의 풍경이 이 계절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다.



계획대로라면 바다 물놀이를 즐기고 있을 시간. 현실이 계획을 따라가지 못한 채 다른 각도로 틈을 벌여 놓았다. 그런데 그 틈새로 새로운 여행의 장면들이 태어난다. 내 안에서 떠돌던 불안의 물음표는 잠잠히 자취를 감추고 대신 경탄의 느낌표가 솟아난다. 여행자라면 이런 찰나를 수집하는 사람. 카메라를 꺼내어 찰칵, 사진을 찍는다. 시간을 담는다. 오래도록 깊어질 우리만의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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