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초콜릿 박물관이 있다. 지역구 유튜브 채널에 이곳을 소개하고자 촬영을 가기로 했다. 개관한 지 5년 정도 된, 개인이 운영하는 박물관이었다. 초콜릿을 얼마나 좋아하면 박물관을 다 만들었을까. 사람에 대한 궁금증으로 설레는 마음이 오랜만이었다.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니 개인 박물관임에도 규모가 작지 않았다. 하교 후 집에 머물고 싶어 하는 작은 아이를 '수제 초콜릿'으로 섭외했다. 이곳 관장님이 진행하는 초콜릿 만들기 수업을 영상에 담기 위해서였다.
박물관은 차로 15분 거리, 초콜릿색 지붕을 얹은 벽돌 건물 1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커다란 모형 카카오나무, 각양각색의 초콜릿이 놓인 진열대, 유럽의 고가구와 도자기 찻잔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작지만 아늑한, 초콜릿 나라에 빨려 들어온 기분이었다.
달콤한 냄새도 났다. 박물관 한쪽에는 카페 카운터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는데, 앞치마를 두른 관장님이 그곳에서 우릴 반겼다. 보라색 야구 모자와 검은 뿔테 안경이 그녀의 경쾌하고도 진중한 성격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했다.친근한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데 그 눈빛이 반짝여서 '호호아줌마'가 떠오르기도 했다. 차숟가락처럼 몸이 작아져 숲 속동물과 친구가 된 호호아줌마처럼 이곳의 '초콜릿 아주머니'는 맛 좋고 앙증맞은 초콜릿 조각과 친구가 되었겠지.
요즘 초등학생이 얼마나 바쁘냐고, 관장님은 아이에게 와주어 고맙다 했다. 수업을 앞두고 긴장했던 아이의 딱딱한 표정도 초콜릿처럼 사르르 녹았다. 관장님과 아이가 초콜릿 만들기를 시작하자 나도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게 뭘까? 뭐라고 쓰여있지?"
"카카오닙스?"
"맞아. 이건 카카오 씨앗 껍질을 벗겨서 잘게 부순 거야. 살도 하나도 안 찌고 건강에도 좋은 거란다."
"카카오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지면?"
"카카오톡이요?!"
하하, 큭큭. 관장님의 눈높이 수업에 즐거운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데 간단할 줄 알았던 초콜릿 만들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초콜릿을 굳히기 직전에 가장 알맞은 온도를 찾는 시간, 일명 템퍼링 과정 때문이었다. 이 과정은 초콜릿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초콜릿에는 지방 성분을 이루는 카카오 버터가 들어가는데 온도에 따라 결정의 모양이 달라진다고. 그래서 카카오 버터 결정이 안정적인 모양으로 자리 잡도록 적정 온도를 맞춰야 한다고. 온도를 잘 맞추지 않으면 초콜릿을 굳히고 나서 서로 달라붙거나, 광택이 없거나, 흰 반점이 생긴다고 한다.
일일 쇼콜라티에(초콜릿 만드는 사람)가 된 아이는관장님이 설명하는 대로 침착하게 따른다. 나도 더 가까이, 초콜릿 만드는 아이의 손을 카메라에 담는다. 작은 손은 뜨끈한액상 초콜릿이 담긴 포트를 찬 물에 넣는다. 온도가 떨어질 때까지 초콜릿을 주걱으로 젓는다. 초콜릿이 차가워지자 그 위에 따뜻한 초콜릿을 다시 섞는다. 관장님이 온도계를 담갔다 뺐다가. 아이에게 온도계 숫자를 보여주며 이제 됐다고 말한다.
흘러내리는 초콜릿을 짤주머니에 넣고 틀에 맞춰 예쁜 모양만 만들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한 조각 초콜릿을 제대로 완성하는 일은 결국 적정 온도를 찾는 일이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은근한 온도가 되었을 때 초콜릿은 틀에 부어지고 제 모양을 잡게 된다.
'은근한 온도'란게 몇 도인지 정확하지않다. 손으로 만졌을 때 미지근한 정도를 말하는 걸까. 이런 온도에서도 초콜릿은 가장 초콜릿다운 모습으로 태어난다니. 새삼 '은근하다'는 말이 궁금했다.
은근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야단스럽지 않고 꾸준하다'는 의미였다. '겉으로 나타내지 않지만 속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깊고 간절하다'는 뜻도 품고 있었고. 곱씹을수록 마음에 간직하고 싶은 단어였다.
일과 사람, 삶을 대하는 온도가 날마다 오르락내리락한다. 시작은 뜨겁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드는 내 안의 다짐 때문에 종종 무력해진다. 열정이란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뜨거워야 하는 줄 알았다. 사그라들었다면 다시 타오르게 해야 옳다 여겼다. 하지만 은근한 온도를 가진 열정도 있음을 배운다. 초콜릿 결정이 제자리를 찾아 최상의 맛과 윤택, 단단함을 빚어내는 데 필요한 온도처럼.
"어떻게 이런 박물관을 혼자 운영하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휴,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부끄럽습니다."
나의 말에 관장님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박물관은 이전보다 규모가 축소되어 이제 한 층만 초콜릿 전시관 겸 카페로 운영된다고 한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여인은 아이들 다 키우고 카페를 여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초콜릿에 관심을 갖다 보니 해외를 오가며 전시 물품을 수집하고 박물관까지 열었다. 초콜릿을 직접 만들어 많은 이들과 달콤한 시간을 나누기 위해쇼콜라티에가 되기도 했다.하지만 개관한 지 얼마 안 되어 코로나 시국을 맞닥뜨렸다. 관람객도 받을 수 없었고 카페 문도 계속 닫았다고한다. 코로나 이야기에 여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이란 정신과 육체의 검질긴 노동을 요한다. 박물관을 정결히 유지하고 초콜릿과 음료 제조까지. 눈에 보이는 일만 추려봐도 이 모든 걸 혼자 감당하는 그녀의 하루는 분명 고될 것이다. 그럼에도 날마다 같은 시간에 박물관 문을 열고 닫는 관장님의 열정이 느껴졌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물질적 보상이 뒤따르지 않아도 꾸준히, 간절히. 이런 사람이 은근한 사람일까.
"좋아하니까요. 초콜릿을 좋아하니까 여기까지 왔네요."
촬영을 마치고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내내 마음에 머물렀다. 집에 돌아와 촬영 영상을 컴퓨터에 옮겼다. 짤막하게 찍은 영상 클립이 팔십 여개. 가편집과 자막 만들기,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알맞은 음악을 입히는 일이 남았다. 이제 나도 좋아하는 마음을 연료 삼아 불을 지필 시간이다. 그 불이 활활 타오르지 않아도 괜찮다.그저 꺼뜨리지 않으면 된다. 작지만 꾸준히 타오르는 불. 은근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