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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시도하기

망설이는 마음에 쓰는 말

by 혜일

겨울 추위가 본격적으로 찾아왔을 무렵 새 오븐을 들였다. 며칠 후면 아이들 종업식이었고 내게는 새해를 맞이한 감격보다 미처 잠재우지 못한 불안이 더 큰 상태였다. 빵을 만들어보자. 생각의 방향은 엉뚱하게도 홈베이킹으로 흘러갔다. 베이킹 레시피 책을 가끔씩 들춰보며 언젠가 시작하리라 다짐만 했던 게 여러 번. 그 언젠가가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눈여겨보던 오븐을 결제하자 하루 만에 집에 도착했다. 이어 도착한 전자저울, 핸드 믹서, 빵틀 같은 베이킹 도구들을 조리대 위에 늘어놓자 평범한 주방이 근사한 작업실처럼 느껴졌다.



베이킹 초보가 가장 먼저 시도한 빵은 카스텔라. 이름만 떠올려도 몽글몽글한 기억이 피어오른다. 카스텔라는 초등학교 때 엄마가 만들어 내어 주던 간식 중 으뜸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떤 맛이었더라. 간혹 까맣게 탄 겉 부분을 긁어내고서라도 먹었던 엄마의 카스텔라는. 지금은 그 맛이 아련해졌지만 카스텔라 반죽을 만들던 엄마의 뒷모습은 기억 속에 선명하다. 엄마의 등 뒤로 그리움이 겹쳤다. 잠든 미각을 흔들어 깨우는 가장 강력한 맛, 그리움. 두 손은 재빠르게 카스텔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실온에 꺼내 둔 계란 다섯 개를 노른자와 흰자로 조심스레 분리했다. 박력분 밀가루를 채에 내리니 노른자와 버터, 우유를 섞은 반죽 위에 희고 고운 눈이 덮였다. 달걀흰자와 설탕을 핸드믹서로 섞는 작업은 작은 아이가 도왔다. 큰 거품과 작은 거품이 번갈아 일다가 사라지더니 생크림처럼 쫀득하고 부드러워졌다. 믹서를 멈추자 하얀 크림이 위로 솟은 뿔 모양이 되었고 우리는 "우와!". 가벼운 탄성을 내뱉으며 즐거워했다.



베이킹 레시피가 익숙하지 않아 블로그 글과 유튜브 영상, 베이킹 책을 수시로 열고 닫았다. 그러느라 두 손은 쉴 새 없었지만 마음은 내내 설레었다. 레시피 그대로 과정에 충실했으니 자연스레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걸까. 설렘이란 좋은 미래를 상상할 때 받는 선물 같은 감정이니 말이다. 빵 굽기를 지속하는 한 나는 계속 설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몇 가지 재료를 정해진 숫자대로 계량하고 배합만 잘하면 빵이 만들어진다니! 반죽을 부은 빵틀을 예열한 오븐 안으로 밀어 넣던 순간까지 나는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십여 분쯤 지났을까. 오븐 안의 카스텔라는 위로 크게 부풀더니 가운데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짐이 심해 움푹 파인 모양이 꼭 마른 골짜기처럼 보였다. 반죽의 문제일까, 굽는 온도가 안 맞아서 그럴까. 처음이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카스텔라가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꺼냈다. 빵의 아래쪽도 실망스러웠다. 반죽이 고루 섞이지 않았는지 층이 생겼다. 레시피대로 열심히 만들었지만 결과는 엉망. 실패라는 이름의 빵이 구워졌다. 아, 이걸 어떻게 먹는담. 설렘은 달아나고 울적함이 밀려왔다.


"모양은 이상해도 돼. 맛있으면 괜찮아!"



어느새 카스텔라 냄새를 맡고 쪼르르 달려온 작은 아이가 말했다. 모양은 이상해도 된다고? 그 말에 실패작 카스텔라 맛을 볼 용기가 솟았다. 그렇다면 어디, 맛은 있을까. 한 김 식힌 카스텔라를 케이크 조각처럼 잘라 서로 나누어먹었다. 모양은 우스꽝스러웠으나 촉촉하고 달콤한 맛은 카스텔라 특유의 맛이었다. 카스텔라의 윗부분이 갈라진 이유도 다른 베이킹 영상을 보다가 알아낼 수 있었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했으니 다음에는 더 나은 카스텔라를 구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갈라짐이 해결되어도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겠지만.



이상한 모양의 빵도 된다는 아이의 말에 이상한 용기가 생긴다. 나의 오븐 안에서는 이상하고도 별난 빵들이 줄줄이 구워져 나올 것만 같다. 꼭 베이커리 가게에서 파는 것 같은 모양이 아니면 어떤가. 이상한데 별난 맛을 지닌 빵, 색다르게 맛있는 빵을 기대할 수 있는 게 홈베이킹의 매력 아닐까.



그런 빵을 만들 때까지 실패는 당연한 수순. 자연스레 겪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적어도 베이킹의 시간 안에서 실패의 경험이란 단번의 성공보다 큰 가치를 지닌 게 아닐까. 그러니 실패를 시도하기.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 망설일 때면 이 말을 마음 위에 다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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