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이고 있는데 '드르륵' 휴대폰 진동벨이 울렸다. 평소 같으면 이 늦은 시간에 연락할만한 이가 없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연락의 주인공은 여행 중이신 아빠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아빠'님이 사진 21장을 보냈습니다.>
알림 창에 뜬 메시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눌렀다. 아빠가 오늘 보내온 사진은 스페인 이비자 섬과 거리의 풍경들. 아이보리빛으로 도색된 외벽에 하얀 햇살이 맞닿아있고 진초록 창문이 달려있는 집들이 이국적이고 예뻤다.
자야 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또 다른 사진 한 장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한여름인 듯 외국인 관광객들은 수영복차림에 해수욕을 즐기느라 여념 없어 보이고. 하늘을 닮은 바다, 바다를 닮은 하늘이 경계가 모호한 층을 이루며 회색빛 모래사장이 명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 그 풍경 한가운데 엄마가 서 있었다.
지난 설명절이었다. 올해 칠순을 앞둔 엄마에게 우리는 생일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신지 물었다.
"올해 아빠랑 크루즈 여행 가려고. 여행사에 예약해 놨어. 서유럽 쪽 나라들은 꼭 가보고 싶었어."
엄마의 대답에 적잖이 놀랐다. 크루즈 여행이라니. 그것도 멀리, 지중해 근처 나라들을 열흘이나 관광하는 것이라 했다. 크루즈란 것을 떠올리면 영화 '타이타닉'밖에 생각나지 않던 나로서는 엄마의 선택이 굉장한 도전처럼 들렸다.
일단 엄마는 무릎이 좋지 않다. 병원에서 인공 관절 수술을 권유할 만큼 무릎이 아픈 상태다.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걷는 일에 취약해진 엄마의 무릎이 장시간 해외여행을 잘 버텨줄까. 나도 모르게 걱정이 앞섰다.
한편, 아빠는 날마다 한두 시간은 기본, 꾸준히 쌓은 운동 경력으로 건강하신 편이지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는 게 함정이었다. 한 번씩 여행을 논할 때면 "집 놔두고 왜 밖에서 자냐."란 말은 아빠의 모토. 두 분이서 재밌는 유럽여행, 가능할까.
결론적으로 나의 소심한 걱정은 기우였다. 로마, 프랑스 마르세유, 스페인 바르셀로나... 아빠는 매일 늦은 밤마다, 행선지가 바뀔 때마다 내게 여행 중 사진을 보내주었다. 한국 시각으로 밤 12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오시는 것 같았다. 아빠는 그때서야 연락할 짬이 나시는 듯했다.
아빠의 카톡 연락이 처음에는 의외였고 낯설었다. 평소 같았으면 보통 엄마가 사진과 영상으로 소식을 전해왔을 텐데. 엄마의 연락은 여행 첫날, 경유지로 들린 두바이 공항에서 딱 한 번뿐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인터넷이 잘 안 된다고 했다. 두 분이 출발하기 전에 여행 준비하는 일을 세심히 도와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고 죄송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상황이 모두에게 잘된 일 같기도 했다.
사진 속의 엄마는 자유로워 보였다. 한낮에는 기온이 높은지 다소 지친 표정의 엄마 얼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여행을 잘 즐기고 누리는 모습이었다. 휴대폰 연락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오히려 엄마에게 여행의 시간을 충만하게 하는 게 아닐까. 사람 챙기기 좋아하는 엄마는 좋은 풍경 앞에서 아마도 열 사람은 족히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휴대폰을 열어 연락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테지. 사진을 보내고 답장을 챙기느라 낯선 여행지에서 분주했을 엄마.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 연락의 부자유가 엄마에겐 오히려 자유였으리라.
오랫동안 꿈으로만 품고 왔던 이국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순간만큼은 엄마도 엄마만 생각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자식 걱정, 살림 걱정, 끼니 걱정 없이. 새롭고 넓은 세계에서 경탄하는 순간마다 엄마도, 새로운 자신을 보물처럼 발견하고 품길 바랐다. 로마의 콜로세움이나 스페인의 가우디성당만큼 오래되고도 깊은, 그래서 둘도 없이 홀로 아름다운 엄마의 역사를 떠올리고 사랑하길 바랐다.
-두 분 정말 행복해 보이시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 것 같아 저도 좋네요.
-엄마는 꽤 신난 것 같다.
-아빠도 끝까지 좋은 여행 되세요!
-그래, 고맙다. 잘 자라.
아빠도 모든 게 좋다고 했다. 그 좋은 마음은 내게 쓴 짧은 문장 끝마다 달린 웃는 얼굴, 하트를 통해 듬뿍 느낄 수 있었고. 덕분에 부녀 사이가 몇 번의 카톡연락만으로 더욱 애틋해진 건 예기치 못한 수확이다.
아빠의 사진 전송은 하루이틀로 멈추지 않았다. 여행 기간 내내 매일같이 다채로운 사진으로 안부를 전해 오셨다. 여행지에서는 보통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에게 사진을 보내기 마련인데. 마음이 먹먹해진다. 아빠는 이렇게 부지런히 사랑하는 사람이었구나 싶어서. 덕분에 나까지 크루즈를 타고 여행하는 기분에 자주 휩싸인다. 여행하지 않아도 여행하는 기쁨을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