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물다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

by 혜일

집에서 이십 분 정도 차를 타고 일몰 명소라 불리는 바다 공원에 갔다. 매 달 지역구 관련 영상콘텐츠를 만들고 있는데 여름에 촬영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곳이었다. 여름 하늘의 일몰은 사계절 중 특히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저녁시간에 맞춰 나가면 더위도 한풀 꺾여 촬영도 수월할 것 같았다. 게다가 공원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으니 홍보용 콘텐츠로는 손색이 없을 듯했다.



일몰시간을 앞두고 여유 있게 공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원 입구에서 주차장까지 들어가는 길이 꽉 막혀있었다. 주차장 자리는 넓지 않은데 일몰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린 탓이었다. 게다가 토요일 저녁이었다. 주중에는 계속 날이 흐렸고 다음 주 날씨 예보는 연일 비 표시가 되어있던 터. 온종일 맑음 표시는 중간에 낀 토요일 하루뿐이었다. 토요일에 촬영해야겠네, 생각만 했지 주말이라 나들이 인파가 많을 것이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거북이들이 기어가듯 차들은 느릿느릿 움직였고 공원 입구에서만 이십 여분이 훌쩍 지났다. 주차를 할 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는 상황. 그 사이 일몰 시간에 다다랐다. 바다 너머 해가 지는 풍경을 꼭 찍어야 하는데 주차를 제대로 할 여유가 없었다. 이대로 기다리다가는 헛걸음에 그칠 것이 뻔했다. 어떡해야 하나 답답해하던 찰나, 앞의 차량에서 운전자와 일행이 내렸다. 주차 자리를 찾기 위해 대기하던 곳에 말이다. 그 순간 나도 비상등을 켜고 이중 주차를 한 채로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 내렸다. 일몰이 끝나기까진 몇 분이면 될 테니까.



달걀노른자처럼 동그란 해가 수평선에 맞닿아가는 동안 주변 하늘은 점차 주홍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거구의 천사가 떼어놓은 날개일까. 흰구름이 천천히 풀어졌다.



'어머, 저건 꼭 찍어야 해!'



한 번뿐인 인생, 놓쳐선 안될 명장면을 만난 듯 나는 홀린 사람처럼 일몰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댔다. 미리 대여해 간 DSLR 카메라와 삼각대를 세팅할 새도 없었다. 휴대폰 카메라를 열어 재빨리 일몰 풍경을 담았다. 비로소 '영상촬영'이라는 목적을 가까스로 달성했다. 마음이 놓이면서 신비했고, 신비한 풍경 앞에서 그리움도 밀물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맑은 하늘에 지는 선명한 노을을 마주할 때면 어릴 적 내가 살았던 동네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2층 방 안에서나 옥상에 오르면 서쪽 하늘, 지평선 아래로 해가 저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영원히 타오를 것만 같은 그 강렬한 빛이 사그라들며 소멸하기까진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장면을 무심코 쳐다보았다가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나는 그때 마주했던 노을이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길이가 짧디 짧기에 바라보고 있노라면 감탄과 동시에 애끓는 심정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종종 집 안에서도 하던 일을 멈추고 해지는 하늘을 바라보곤 한다. 건너편 아파트에 가려서 하늘은 조각을 잘라놓은 것만 같다. 오렌지빛, 금빛, 보랏빛으로 번지며 대기는 하늘을 무대 삼아 춤추듯 움직인다. 이내 코발트빛으로 어둠이 짙어지며 공기가 차분해지는 순간.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되었다는 안도감도 짙어진다. 단 하루도 삶이 나의 힘과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내 뜻과 고집대로 움직이지 않은 하루에 감사하게 된다.



노을이 지면 오늘의 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의 해가 저물어야만 내일의 해가 뜰 수 있다. 해가 지고 다시 뜨는 일이야말로 무한히 반복된다. 노을은 짧고도 단편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그 너머에 생명과 시간의 영원성이 숨어있다. 그러니 자연의 시계인 해를 가리켜 '사라지다'가 아닌 '저물다'라는 표현을 쓰나 보다.



가만히 서서 해가 저무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그 모양과 빛깔이 다르다. 오늘 하루도 변함없이 변화했다는 것을 실감한다. 설령 오늘 나의 하루는 그리 아름답지 못했을지라도 노을을 바라보면 마음이 괜찮아진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일도 마냥 아쉽거나 두렵지만은 않다. 오늘의 해가 저물어야만 내일도 찾아올 테니까. 아름다움을 짓는 일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 한 여름, 해질녘 노을 같은 아름다움이 내 삶에도 지어져 가길 꿈꾼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걱정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