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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주연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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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Aug 17. 2020

자정의 스프

철 지난 방풍비닐 덕에 방 안은 한 줌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을 벗어던지고 밝음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워 고단한 몸을 누여도 좀체 잠들 수 없다. 매일 사그라드는 밤의 끄트머리를 끈질기게 붙잡고 질척댔다. 그러면서도 그 밤에 잡아먹히는 것은 몹시도 겁이 났다. 유독 깊은 어둠에  휩싸이는듯한 날에는 형광등을 환히 켜 두고 팔등으로 눈을 가린 채 겨우 잠이 들곤 했다. 


6년 동안 혼자서 살던 원룸은 2층이라 바깥의 가로등 빛이 방으로 내렸다. 전구의 노란빛이 계절에 따라 흩어지거나 부서졌다. 덕분에 방의 불을 모두 꺼도 완전한 어둠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도저히 잠들 수 없는 어떤 날들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면 자정이 훌쩍 넘거나, 어스름하게 아침이 밝아와도 나는 몸을 일으켜 앞치마를 둘러맸다. 


시작과 끝이 언제인지 짐작이 어려운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이 나오는 씨디를 재생시키고서는 베란다로 가서 감자나 단호박, 밤고구마 같은 걸 꺼내왔다. 집에는 언제나 스프를 끓일 만한 재료를 조금씩 준비해두곤 했다. 때때로 냉동실에 얼려둔 햇완두콩이나 색이 조금 변해가는 양송이버섯, 언제 사두었나 기억이 가물하지만 너무 멀쩡해 보이는 당근 같은걸 냉장고 신선 칸 안쪽에서 발견해내기도 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날엔 통조림 강낭콩이나 990원짜리 동원 스위트콘으로도 스프를 만들었다.


자정의 고구마 스프 

냄비에 커다랗게 자른 버터 한 조각과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채 썬 양파를 오랫동안 볶았다. 양파가 캐러멜 색을 내며 흩어질 때 즈음 얇게 자른 메인 재료와 감자를 넣고 다시 오랫동안 볶았다. 주걱을 잡은 팔 안쪽이 뜨끈뜨끈해지면 손을 바꿔가며 멈추지 않았다.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하고 재료가 잠길만큼만 자박하게 물을 부었다. 말린 월계수 잎 하나를 넣고 재료가 완전히 익을 때까지 끓는 냄비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무주걱으로도 쉽게 부스러질 정도로 재료들이 푸욱 익으면 젓가락으로 월계수 잎을 건져내고 냄비에 바로 도깨비방망이(푸드프로세서)를 넣어 재료를 갈았다. 냄비 한쪽 귀퉁이에서 기계를 작동하면 처음엔 푸드덕푸드덕 소리를 내며 재료들을 빨아들이다가 금세 곱게 갈린 재료들이 나선형을 그리며 본연의 빛을 뽐냈다. 그 나선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해마다 다시 찾아보게 되는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뭔가를 실패해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걸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원'이 아니라 '나선'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맞은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도는 듯 보였겠지만 조금씩은 올라갔거나 내려갔을 거야. 그런 거면 조금 낫겠지. 아니, 그것보다도 인간은 '나선' 그 자체인지도 몰라.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면서 그래도 뭔가 있을 때마다 위로도 아래로도 자랄 수 있고 앞으로도...
내가 그리는 원도 점차 크게 부풀어 조금씩 나선은 커지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힘이 나더구나.


재료가 곱게 갈린 고농도의 퓨레는 당장 먹을 만큼만 냄비에 남기고 1인분씩 나눠 포션 했다. 냄비에 남은 퓨레에 우유를 부어 다시 한번 뭉근하게 끓여내면 완성이었다. 따뜻하게 데운 그릇에 스프를 담고 바싹 구운 빵이나 시나몬 가루를 곁들여 바닥을 싹싹 긁어먹었다. 뜨거운 김이 풀풀대는 스프를 이불을 뒤집어쓴 채 후후 불어  먹으면 어떤 말이나 마음으로도 데워지지 않았던 마음에 조금은 온기가 돌고 긴장이 풀려 짧게나마 단잠이 들 수 있었다. 양파를 천천히 볶고 이것저것 욕심껏 넣어 끓이면 괜찮다 다 괜찮다 다독여주는 토닥임의 맛이 완성되었고 나는 두껍고 진한 그 맛을 머리 끝까지 덮고서 잠에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스프를 먹는 동안 한 김 식은 퓨레들은 언젠가 먹을 수 있게 냉동실에 넣거나 직장 동료들의 냉장고로 가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마음이 자주 복잡하고 요동치던 시기에는 냉동실에 색색의 퓨레들이 쌓여갔다. 밤고구마와 까만 깨를 함께 끓여 퓨레를 만들면 시멘트색이 났다. 단호박으로 퓨레를 만들 땐 당근을 함께 넣어 아주아주 선명한 여름의 해바라기를, 감자에는 사과나 그린 올리브 몇 알을 함께 넣어 순한 아이보리빛과는 달리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을 숨겨두었다. 



집에 사람들이 찾아올 때도 나는 어김없이 스프를 내어주었다. 날이 춥거나 혹은 그보다 차갑게 마음이 얼어붙어도 뜨끈한 스프 한 그릇이면 누구라도 마음을 풀어헤치고 내게 얕게나마 곁을 내어주었다. 매일 아침마다 새로 스프를 끓이는 것이 내 임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커다란 솥에 재료를 왕창 쏟아붓고 힘들게 주걱으로 저어가며 스프를 만드는 일이 버겁게만 느껴졌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 더 이상 그 일이 내게 부담을 주지 않게 되자 나는 다시 가스불 앞에 서서 나무주걱으로 스프를 저을 수 있었다. 다시는 음식 장사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가도 스프를 만들 때면 그 다짐이 속절없이 무너져 노트에 스프가게 이름을 끄적이곤 했다. 스프를 만드는 일만이 내게 유일한 안식이었다. 나이를 많이 먹고 한적한 동네에서 스프가게를 열면 어떨까, 장사가 잘 되지 않아 남은 스프를 내가 다 먹어야 해도 별로 괴롭지 않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말이다.


요즘은 스프를 만들어 나눠먹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모두 각자의 어려움에서 헤매고 흔들리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 저 멀리서 보게 되면 결코 제자리에서만 빙글 대던 게 아니었다고, 우리는 위로도 아래로도 자랄 수 있고 그러다가 앞으로도 나아갈 것이라고 다독이며. 뜨거운 스프를 후룹거리며 웃고 또 울며. 모든 어둠 뒤에는 빛이 있다 여기며. 쿠스쿠스? 쿠스쿠스 :-)




SAGA _ 내 인생은 영화가 아니니깐

https://youtu.be/dYCON7Ctb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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