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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Sep 03. 2020

날이 참 좋길래.

선연.선명.선선

어젯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들은 노래처럼 오늘 날이 참 좋다.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 세차게 불던 비바람은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가을이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창문으로 맑은 하늘이 보인다. 지독했던 여름이, 어쩐지 모든 것이 윤몰되는 기분에만 빠지게 하던 여름이 드디어 자취를 감추려 한다. 

날이 참 좋길래 때 이른 가을 셔츠를 꺼내 입었다. 셔츠에 어울릴만한 목걸이도 하나. 손톱엔 옅어진 봉숭아 물이 선연하다. 모든 것이 아름답기만 한 날인 듯 착각에 빠질 것만 같아 서둘러 짐을 챙겼다.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셔츠 깃 너머의 목덜미와 쇄골 주변은 얼룩덜룩 붉은 자국들이 선명하다. 이번 여름엔 스트레스가 심해지며 몸 이곳저곳을 마구 긁었다. 온몸을 감싸는 소양감은 몸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었지만 나는 손톱을 세워 몸을 긁거나 손바닥으로 찰싹 소리가 나게 때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붉은 자국이 가려지게 단추를 모두 잠글까 하다 그냥 두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건물 복도에서부터 선선한 가을이 내게 와서 부딪힌다. 단정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주저하던 나는 이제 아주 조금은 주저함이 없는 발걸음으로 길을 걷는다.  왈칵이는 어떤 마음을 누르고, 미파솔솔 라솔파미레도 음계를 흥얼거리며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단층 건물의 작은 카페에 앉아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하늘에는 어떠한 티끌도 없다. 물론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 하늘은 그저 모든 것을 품고 아우르고 내려다볼 뿐일 것이다. 어젯밤 눈물을 찍어내며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의 눈처럼, 스스로도 정의가 잘 내려지지 않던 나의 감정들을 쓸어내려주며 함께 우는 어떤 마음들처럼. 


그리고 모든 계절의 시작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을 되뇌어본다. 안부를 물을 수 없기에 그저 마음으로만 읽는 그이들의 이름을, 몸짓을, 목소리를. 조건 없는 사랑으로 나를 괴롭게 하던 사람들.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흔적들을 기어이 좇으며 어설픈 추억들에 잠시 매몰되거나 휩쓸리며. 

먹구름, 양떼구름, 조개구름, 새털구름, 뭉게구름, 비구름, 무리 구름, 안개구름, 차일구름, 아치구름, 삿갓구름, 거친물결구름... 소설에서 마음을 다스리려 지질시대 구분표를 암송하던 영주처럼 구름들의 이름을 작고 낮은 소리로 말해본다. 세상의 모든 구름들에 실어 보낼 안부를 혼잣말로 뱉어내며. 





곽진언 _택시를 타고

https://youtu.be/lkaNKw3Op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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