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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Sep 21. 2020

mystery of summer

여름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시원한 바람을 조금 쐬고 싶었다. 빌라의 계단 아래 구석에서 먼지와 한 몸이 된 듯 시간을 잔뜩 뒤집어쓴 자전거를 꺼냈다. 묵은 먼지들을 천천히 닦아내니 자전거와 내가 지나간 여러 길, 함께 웃고 울고 바람을 맞던 날들이 스륵스륵 지나간다. 조금 독특한 모양의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디든 괜찮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이탈리아의 여름을 누비던 엘리오처럼.


인적이 드문 곳을 생각하며 페달을 밟았다. 돌아올 걱정은 뒷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고서 끝을 모를 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던 곳까지 닿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강가에는 내 키보다도 높게 자란 갈대들이 가득이었다. 바닥의 잡초들은 무릎까지 올라와 다리를 스쳤다.


바람은 제법 시원해졌지만 아직 한낮에는 해가 한창이라, 그늘이 없는 곳에 덩그러니 있던 벤치는 따끈하게 데워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이 부둥키는 소리만이 그곳에 가득했다. 강물은 빛을 반사해 잔잔한 물결마다 윤슬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하늘을 바라본 채 벤치에 똑바로 누웠다. 얇은 천에 햇볕이 들이쳐 눈 앞에서 한참이나 일렁였다. 눈을 꼭 감아도 빛들은 눈꺼풀 속에 여전히 남아 어둠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어폰에서는 뜻을 알 수 없는 타국의 노래들이 연이어 재생되고 있었다.  조금 어색하고 신기한 이방인이 되어 친절한 겉모습과는 다른 속내를 잘 알 수 없는, 나와 다른 색의 눈동자를 가진 이들이 있는 그곳만이 어쩌면 내게 티 없이 깨끗한 평온을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불어넣는 목소리. 이대로 깜빡 잠이 들어도, 어쩌면 다시 깨어나지 않아도 좋을 아늑하고 또 아득한 기분이었다. 어디에서나 써진 모든 글을 읽을 수 있고, 노랫말을 이해하고, 사람들과 어렵지 않게 말을 섞을 수 있는 이 곳이 실은 내게는 더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날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바다색과 나무색 또는 시멘트색과 해바라기 색이 섞인 듯한 오묘한 눈동자들. 그들에게 나는 완벽한 타인이므로 최소한의 친절만을 베풀면 되는 여행자였다. 나의 과거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내게 어떤 종류의 피로도 선사하지 않았던 파랗고 노랗고 깊은 눈의 소유자들. 출신이 어딘지 모를 동양인 여자를 무시하는 행동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냥 못 본 체를 할 수 있는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어떤 용기가 그때의 나에게는 있었다.


지금은 다 사라져 버린 그것이 내게는 또 다른 죄책감이 되어 나를 누르고, 이불속으로 숨고 싶게 만들었다. 가슴을 펴고 걸으라며 어깨를 당겨주는 커다란 손이 내 등을 두드리고 함께 걷자며 팔을 잡아끌어도 나는 선뜻 발이 떼어지지 않아 괜히 실없이 웃기만 하는 날들. 끝매듭이 잘 지어지지 않은 글 비슷한 어떤 것들을 두드려보는 것. 땅거미가 진 길을 천천히 걸을 때 목적지가 자꾸만 사라지는 기분. 가짜 호수에 사는 거위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따라가는 늙은 개의 눈동자. 어두운 밤, 자전거 페달을 계속 계속 밟다가 갑자기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상상.




mystery of love - sufjan stevens

https://youtu.be/KQT32vW61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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