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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Oct 13. 2020

엄마가 또.

어린 시절, 10월은 일 년 중 가장 설레는 달이었다. 더위를 많은 타는 내게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완연한 가을이 되었음을 알리는 10월. 가족 중 생일이 가장 늦은 달에 있는 내 생일의 11월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알람 같은 10월. 대체적으로는 혼곤한 날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시간이 흘러 내가 자라나고 조금 늦은 생일을 기꺼이 맞이하게 하는, 깊고 노련한 가을을 선사하는 10월이 내게도 있었다.

 

나에게 '좋은 가을날'이라는 것이 사라진 2012년의 10월은 몹시 춥고 바람이 불었다. 그 해에 반지하에 살던 나와 내 개는 유달리 많이 아픈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몸 이곳저곳이 아픈 것을 참아가며 일을 했고, 내 개는 내가 없는 반지하 방에서 13시간 동안 티브이 소리를 들으며 나를 기다렸다.


나는 그 반지하집으로 광복절에 이사를 했는데 그날 밤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다음날 오후가 되자 신발을 벗어두는 현관 타일 바닥에 밖에서 스며들어온 빗물이 찰랑거렸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맡은 편 집은 정강이의 반쯤 올라올 만큼이나 물이 차올라 별 것 없는 플라스틱 가재도구 몇 가지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그 집에 살던 남자는 침수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온 듯했다. 빨간 고무장갑을 찾아 낀 남자가 나서서 하수구를 막은 나뭇잎과 쓰레기들을 걷어내고 계단 밑 창고에 있던 양수기를 꺼내 노련하게 작동시켰다. 이런 일은 몇 번이나 겪어 본 사람처럼, 무표정하지만 몹시도 고단한 얼굴로. 그는 빗물인지 땀인지 어쩌면 눈물일지도 모르는 것을 온몸으로 쏟아 맞은 것처럼 젖은 채 자신 앞에 놓인 장애물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여름이면 매번 서울의 어디가 잠겼다, 강물이 범람해 경기도의 어디에 난리가 났다고 하는 소식을 뉴스로 들었었다. 집이 물에 잠긴 이재민들의 영상이 브라운관으로 흘러나오면 나는 넋 놓고 티브이를 보곤 했었다. 자연재해의 무서움을 피부로 느끼지 않았지만 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은 한동안 비가 내리는 날마다 뇌리를 스쳤었다.  반면 내가 열아홉까지 살던 곳은 어쩐지 눈도 비도 적당한 곳이었다. 눈이 많이 온 어느 해에는 쓰레기장에서 비료 포대를 찾아내 동네 아이들이 야트막한 남산에서 엎치락뒤치락 썰매를 탈 정도의 시골이었다. 그런 시골에서 침수라는 것은 겪어 본 적이 없던 일이라 나는 문을 연 채로 발이 얼어붙었다. 입을 꾹 다물고 연신 물을 퍼내는 그의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지만 어릴 적 티브이에서 봤던 이재민들의 얼굴이 그의 얼굴에 잠시 동안 겹쳐져 보이기도 했다. 어째서 같은 건물의 반지하인데 저 집만 저리 되었나 물으니 처음 저 집에서 물이 역류했는데 집에 사람이 없어 초기에 대처가 힘들었다 했다. 건물이 지어진 지대가 조금 삐뚜름한 것도 한몫을 했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엄마와 함께 이사를 했던 그 반지하집. 엄마는 시골에서부터 면이 좋은 라벤다색 이불을 사서 버스를 타고 왔었다. 내가 서울에서 사는 동안 엄마가 딱 한번 와본 집이었다. 여름에 이사를 했는데 그 해 가을에 엄마가 갑자기 죽었다. 죽었다는 표현이, 그 표현에서 떠올리는 '엄마가 이제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나를 몹시도 옥죄는 가을이었다. 그 날 이후 가을마다 나는 매번 계절성 우울증 비슷한 것을 느끼며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벌써 일곱 번의 가을이 나를 지나 또다시 가을이 왔다. 언젠가부터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면 엄마가 죽는 꿈을 꾸곤 했다. 이미 죽은 엄마가 내 꿈에서 또 죽어서 우리를 장례식장으로 불렀다. 꽃 자수가 놓인 색동 버선을 신고, 수의를 입고  눈을 감은 채 누운 엄마가 내 눈앞에 있었다. 꿈속의 나는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춤거리며 서있었다. 나는 엄마를 만질 용기가, 엄마를 안아볼 자신이 없었다. 숨을 가쁘게 쉬며 엄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여자는 향기가 중요하다며 목욕을 하고 나면 꼭 코롱을 뿌리던 사람이었는데 강한 소독약 냄새에도 엄마는 평온했다. 엄마는 자신의 냄새가 사라질 만큼 지독한 냄새에 덮여 그냥 잠이 든 것 같았다. 


꿈을 꿀 때마다 어떤 순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롭다. 하지만 그 괴로움이 엄마 이야기를 글로 쓸 때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생일이 가까워 온다며 들뜬 척을 했지만 가까운 이들은 나를 잡아먹은 우울감에 나만큼이나 슬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남의 일이라. 나의 지나친 우울감이나 자기 방어적 행동들에 지쳐 떠나거나 내가 먼저 손을 놓아버리곤 했다. 


일주일 뒤면 다시 엄마의 기일이다. 스물아홉의 가을에 나를 낳아 길렀던 엄마가 그 날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올해로 예순셋, 두 아이의 외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조카들에게 할머니가 아닌 '엄마의 엄마'로만 남게 되었다. 요즘 부쩍 철이 든 큰 아이나 춤사위가 예사롭지 않은 둘째를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나의 슬픔이 제일 크게 느껴져 엄마를 떠올리면 엄마가 어딘가 살아있을지도 모를 착각에 빠지거나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지나치게 울어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엄마는 너무나 멀쩡하게 살아계시는데 우리 엄마만 죽은 게 억울하고 서러웠다. 엄마가 죽은 후로는 괜히 친구들에게 가족의 안부를 물어보는 경우도 잦아졌다. 그들의 엄마가 내 엄마라고 생각하며, 엄마와 닮은 작은 키의 친구 엄마를 볼 때마다 부러움과 고마움이 내 속에서 뒤엉켜 일렁거렸다. 


엄마가 죽은 후에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려 책을 읽고 영화들을 봤다. 그래도 왜 많은 엄마들이 이렇게나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버리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책을 덮으면 다시 엄마의 지친 단상들, 거기에 함께 따라오는 그의 목소리나 얼굴들은 떨쳐내려 할수록 더욱 내게 달라붙어 나를 넘어뜨리고 큰 소리로 야단쳤다. 한동안 엄마 꿈을 꾸면 술에 취해 욕을 하며 살림살이들을 부수는 그의 모습이, 목을 조르고 부엌에서 칼을 꺼내 든 모습이, 베란다 난간에서 엄마를 던지려던 모습이, 떨어진 핏방울 같은 것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로 재생되었다. 어쩌면 엄마는 그때 벌써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괴로움과 슬픔이 엄마의 안에 가득 차서.


그런데도 매번 10월이 되면 나는 늘 엄마가 또 죽는 것 같다. 내가 사는 동안에 얼마나 더 많이 엄마가 죽을까.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본 것처럼 이렇게라도 엄마를 잊지 않으면 엄마는 그곳에서나마 살아있을까. 실은 내가 꿈에서까지 계속해서 엄마를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괴로움이 엄마를 또.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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