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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Feb 22. 2021

쓰는 사람.

 쓴다는 것이 무엇일까. 들여 쓰기와 띄어쓰기를 맞추며 원고지에 글자를 쓰는 것일까. 혹은 혼연한 담배연기와 아무렇게나 쌓아진 커피잔들 사이에서 풀리지 않는 글을 노려보며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일까.


 일상을 쓰기 위한 준비들로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이 쓰는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매일 일기를 쓰거나 필사를 하고, 틈틈이 메모를 하며 마침내 다가올 '쓰는 순간'을 묵묵히, 그러나 적극적으로 예비하는 사람. 필기구를 움켜쥔 손에 힘을 풀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물 흐르듯 흘러갈 때, 구부러진 새끼손가락의 끄트머리가 흑연 자국으로 거뭇거뭇해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쓰는 사람이 내게는 작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의 힘으로 글을 쓰는 시대는 밀레니엄과 함께, 혹은 그 보다도 먼저 진작에  끝이 났다. 컴퓨터라면 괜히 등짝이 쭈뼛해지는 나도 컴퓨터로 글을 써서 인터넷 세상에 내보낸다. 이제는 손가락보다는 엉덩이와 허리의 힘으로 글을 쓴다.


 글쓰기에는 여러 과정들이 필요하다. 우선 무엇에 관해 쓸지를 정해야 한다. 처음부터 난관이다.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일상에서도 반짝이는 소재는 아주 많은데 나는 그걸 잘 캐치하지 못한다. 또한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 어디까지를 써야 할까를 고민한 적도 있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어서 되려 입을 다물어 본 적이 있다면 이게 무슨 말인지 짐작할 수 있다. 어찌어찌 소재가 정해지면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에서 그 끝을 찾거나 중간 부분을 뚝 떼어내어 자판을 두드렸다.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내 안에 뒤엉킨 여러 마음들을 화면으로 옮길 때, 나는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처럼 글 쓰는 모습이 섹시하지 않아도, 한입 베어 먹은 사과 노트북이 없어도, 구형 랩탑의 덮개를 열고 깜빡이는 커서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순간 자체가 '글을 쓰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한쪽 다리를 끌어안은 자세가 아니었지만, 타들어가는 담배를 꼬나물지 않았지만, 나도 영화나 드라마 속 작가들처럼 자판을 두드리며 웃거나 울었다. 곱실거리는 갈색 털을 가진 강아지를 무릎에 담요처럼 얹어두고, 합판으로 만들어진 문 밖에서는 엉덩이 탐정 노래가 절정이라 해도 쓰려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무엇인가 써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판을 두드리던 날들이 있었다.



 글쓰기는 결코 우아하지 않다. 많은 시간과 인내와 엉덩이와 허리의 힘이 필요하다. 우아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만으로 글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화면이 채워지면 글을 출력해 소리 내어 읽어본다. 글의 순서가 어색하게 느껴지면 가위로 단락을 잘라 그 조각들을 이리저리 옮겨보며 자리잡기를 한다. 처음 글쓰기를 배울 때 나름으로 깨우친 방식이다. 시간이 지나서 많은 작가들이 이런 방식으로 글을 정리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금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오... 내 안의 작가 본능이...'같은 헛소리를 나지막이 뱉으며 끌끌끌 웃기도 했다.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빠르게 잘못된 문장을 찾을 수 있다. 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읽힐 때 어떤 느낌일지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문장과 단락의 위치를 정해 읽기와 고치기를 반복하면 어느 순간 내 손을 떠나 세상으로 가야 하는 순간이 온다. 브런치에서는 발행을 누를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거나 생계를 꾸리기 위한 멸렬한 노동의 순간들도 실은 쓰는 행위를 위한 준비의 순간들이었다. 나를 모르는, 어디에서 어떻게 흘러왔는지 알 수 없는 '읽는 사람' 한 명을 위해서 혹은 그보다 더 클지도 모르는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독자가 없다면 작가도 없다는 말이 왜 이리도 내게 깊이 박혔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언젠가 읽히게 될지 모르는 하나의 글을 완성시키려 나는 앉거나 엎드렸고 때때로 걷거나 뛰었다.  쓸 때의 마음이 쓰지 않을 때의 마음보다 결코 더 즐거웠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 만큼 자주 글을 쓰고 활자들의 곁을 맴돌았다. 종일 글과 씨름하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우습겠지만, 나름으로는 글을 쓰는 순간과 쓰지 않는 순간으로 하루가 나뉘던 시절도 있었다.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는 횟수는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러는 동안 브런치에서 알림이 올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어차피 내 글들 중 조회수가 높은 글은 정해져 있고, 브런치를 통해 그 어떤 생산적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는 굉장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함께 글쓰기나 교정교열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 중 꾸준히 몰두한 누군가는 소정의 결과물을 세상에 내밀기도 했다. 나도 일을 그만두고 글쓰기와 교정교열 학원을 뛰어다니던 때에는 언젠가 대단한 작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무언가, 그 무언가는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냥 나는 돈도 안 벌고 글도 안 쓰며,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욕하면서도 꼭 본다는 막장드라마를 나도 챙겨보며 '우왁! 저런 막장을 생각해내다니! 대단하다!!' 하며 광기로 가득 찬 눈빛으로 미친 듯 자판을 두드리는 그 작가를 상상할 뿐이다. 하지만 사실 그 어디에도 그런 미친 작가나 미친 작업 속도는 없을 것이다. 그녀 혹은 그 또한 '피고름'으로 쓴 자신의 아기를 세상으로 보내기까지 무수히 많은 좌절과 환희의 순간을 수도 없이 교차 경험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부유하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고 대답한다. '아무 생각이 없어.' 물론 아주 조금의 반항을 담은 대답이다. 너와 더 이상 이야기가 하고 싶지 않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진짜로 누군가를 걱정하는 사람은 절대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를 원색적으로 물어보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의 '쓰는 일'에 대한 오지랖이나 어쭙잖은 참견도 없다.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 상대의 부족함을 느낄 때 오는 미세한 우월감, 그걸 그렇게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꼭 있다. 만약 내가 진짜로 하고 있는 생각을 다 쏟아낸다면? 내가 하는 이야기의 티끌만큼도 공감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나는 내 생각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 그들의 꼴같잖은 아는 척에 수긍해주고 싶지도 않다. 우리 주변에 숨어 살고 있는 자존감 도둑들은 친절을 가장해 내 자존감을 빼앗아간다. 우리는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세대들인데, 꼭 그렇게 다 뺏아가야만 속이 시원했냐고 묻고 싶다.


 쓰는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은 작년, 내가 아주 강력한 자존감 도둑을 만나 카운터 펀치를 맞았기 때문이다. 글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그냥 숨고 싶었다. 그런데 끈질긴 놈들은 그래 너 이제 가! 너 이제 다 써먹었어! 하지 않는다. 빨대를 꽂아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고 나서야 놓아준다. 잊을만하면 꿈에도 나오고 가끔 길가다가 만날 것 같고 막 그렇다. 그래도 나는 다시 글을 써야 한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쓰고 싶어서 쓰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다이어리에 꾹꾹 눌러 '브런치에 한 달에 두 번 글 발행하기'라고 쓰고 별표 두개를 그렸다. 나는 여전히 요즘 뭐하면서 지내? 하고 물으면 기쁜 마음으로 글을 쓴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만의 소중한 아기를 잘 길러서 언젠가 이 험난한 세상으로 내보내고 싶다. 그 글이 돈을 벌어다 주지 않아도, 밥을 먹여주지 않아도. 여러 사람에게 읽히며 누군가의 마음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점 하나를 찍는 그런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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