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다닌 후로 손톱을 더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양손 엄지의 손톱을.
지난해, 조금 지난한 여름을 보내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자 몸 이곳저곳이 아파왔다. 긴장이 풀려 그런지 어느 날은 하루가 다 가도록 잠을 이상하게 많이 잤다. 또 어느 날은 새벽을 넘겨 아침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기도 했다. 단순히 생활패턴이 망가진 정도를 넘어섰을 때,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앉았다 일어나는 일이 몹시 힘들어졌다. 몇 해 동안 달리기를 해오며 튼튼한 근육을 자부하던 내 다리가 가만히 서 있어도 심하게 떨렸다. 처음에는 다리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온 몸으로 진동이 퍼지는 듯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쁘고 손의 힘도 떨어지는 듯했다. 병뚜껑을 잘 열지 못해 옆사람에게 부탁할 때의 묘한 패배감을 전혀 가녀리지 않은 내가 느끼자니 속이 거북했다. 심지어 음식을 먹어도 살이 빠졌다. 나중에는 음식이 잘 먹히지 않아 액체류만을 마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조금 먹었는데 배가 부르다'를 느끼며 마른 사람들의 입맛 없음을 간접 체험해 보기도 했다. 물론 그래도 그렇게 마른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코로나 블루와 직업상실의 콜라보로 인한 심신 탈락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며 신경과를 방문해 이런저런 검사들을 했다. 다리에 바늘을 찔러 넣어 근육의 상태를 점검했다. 피검사와 우울증 검사도 함께 했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외 내부적 고통들에 기대 나는 마구 눈물을 쏟아냈다. 아직 아무것도 판명이 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울었는지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영수증에 찍힐 검사 금액과 '아 몰라, 그냥 막 울고 싶었어'라는 마음이 뒤엉켜 나온 눈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며칠 후 검사 결과가 나왔고, 나는 신경과 전문의의 소견서를 소중히 챙겨 또 다른 병원으로 가야 했다. 면역이 많이 무너진 상태였다. 심리적인 부분도 컸다. 처음 진단을 받고는 일주일마다 병원에 가서 피를 뽑았다. 아픈 것은 딱 질색이었지만, 오른팔 왼팔을 일주일마다 번갈아가며 피를 뽑으니 멍자국을 차곡차곡 쌓아 흡사 칼라 타투 같은 그라데이션을 새길 수 있었다. 나는 뭐든 그라데이션을 좋아하니까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양팔의 멍 그라데이션은 썩 나쁘지 않았다.
병원에 갈 때마다 담당 선생님께 야단을 맞으며 검사 결과를 설명 듣는 기분은 퍽이나 괴로우면서도 위로가 되었다. 괴로운 것은 나빠진 몸 상태가 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로가 된 것은 그간 몸이 아프거나 살이 찌면 늘 운동부족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어왔기에, (예: 허리가 아프다 - 운동부족 / 다리가 아프다 - 운동부족 / 머리가 아프다 - 운동부족 / 마음이 아프다 - 운동부족) 나 조차도 내 몸이 운동이 부족해서 그런 구린 상태가 된 줄로 알았는데 그게 꼭 내 탓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노동과 운동은 그 결이 조금 다르지만 매일 아주 많은 음식을 만들거나 아주 많은 택배를 챙기는 노동을 해왔다. 게다가 일주일에 두서너번은 한 시간 반 거리를 걸어서 퇴근하고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도 꾸준히 해왔었다. 기초체력이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은 수행평가 때 뜀틀을 잘 넘지 못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느꼈을 때 말고는 잘하지 않았었다. 인바디를 재면 내 퉁실한 지방 안에 숨겨진 근육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래프의 오른쪽으로 팔을 쭉 뻗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운동이 부족해서라고 했다. 웃는 얼굴로 내 옆구리를 찌르며 살 좀 빼라고 했다. 그 웃는 낯들을 모두 일그러뜨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살을 좀 빼면 '거 봐, 빼니까 너무 좋지?' 다시 살이 조금 찌면 '요즘 운동을 조금 소홀히 하나 봐?'라고 넌지시 물었다. 그 얼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다이어트였지만 어느 순간 강박이 생겨 매일 초절식을 하며 세 시간씩 운동을 했다. 그런 행위들은 나를 건강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면역 거지의 길로 들어서게도 했다.
선생님은 6개월에서 1년 정도를 두고 천천히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적이면서도 절망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하루 세 번 먹던 약을 지금은 하루에 한 번만 먹을 만큼 수치상의 건강은 회복이 되었다. 괜히 호숫가를 막 빠르게 달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다가도 가방 안에서 짤랑이는 약통들을 보고 있으면 아직은 조금 참게 되는 그런 정도의 건강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것이 손톱이다. 내 손톱에 생긴 세로무늬들은 잘 짜인 니트의 조직처럼 보인다. 타자를 칠 때도 계속 손톱이 눈에 들어오니 자꾸만 신경이 그리로 간다. 그럼에도 엄지손톱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잘 들지 않는 부분이라 내 손톱의 상태를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다.
병원에 갈 때마다 손톱에 대한 질문을 마음먹고 갔지만 선생님의 수려한 언변에 나는 그만 넋을 놓고 만다. 그의 빠르고 체계적이며 전문적인 지식의 대방출은 나를 입 다물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일생동안 만나본 대부분의 의료종사자들은 대체로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을 널리 널리 퍼트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막상 질문 있어요? 라고 훅! 들어오면 나는 우물쭈물 대다가 인사를 하며 총총걸음으로 진료실을 빠져나오게 된다. 그러고서는 괜히 인터넷에 떠도는 손톱 사진들만 눈이 아파올 때까지 주야장천 들여다보았다.
지난주엔 마음을 굳게 먹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그의 화려한 입담 자랑이 끝나갈 즈음 볼품 없어진 손톱을 내밀었다. 내 손톱을 유심히 보던 그가 자신이 가진 광활한 지식의 숲 저 멀리에서 손톱에 관한 것들을 끌어와 길게 길게 설명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내 손톱이 영원히 이렇게 니트 무늬를 고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진료가 끝이 나 문을 나서려 일어설 때, 그가 매번 덧붙이는 말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해주었다.
'주연 씨, 지금 살 빼려고 운동 안 해도 돼요~ 푹 쉬어요~ 몸이든 마음이든, 힘든 거 하지 마요~'
엄마의 손을 떠올리면 늘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손 끝의 빨간 매니큐어와 움켜쥔 시금치의 대비되는 보색이다. 새파란 이파리들을 무치는 손은 참기름으로 윤기가 돈다. 손톱의 매니큐어는 화장품 가게 진열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빨강을 골라온 것이다. 매니큐어를 늘 발랐지만 엄마 손에서는 화장품 냄새보다는 음식 냄새가 더 강하게 났다. 지난 10여 년 간 내 손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다. 온갖 음식들의 냄새가 레이어드 되어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무척이나 고되지만 내 손으로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즐겁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처음 서울에 와서 음식점에서 일할 때, 영업장 특유의 독한 세제 때문에 손이 다 뒤집어졌었다. 엄마는 그러게 왜 엄마 말 안 듣고 음식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까불어서 손을 이 모양을 만드냐며 꾸중했지만, 말과 달리 그녀의 손은 연신 내 손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처음 몇 해는 겨울마다 따끔거리는 터진 손 끝에 밤마다 연고를 바르고 장갑을 낀 채로 잠을 청해야 했다. 엄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손을 들키지 않으려 바보같이 애를 쓰기도 했었다.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 옛날 일이 되었다. 이제 내 손에는 아무 냄새가 나지 않고 상처 없이 매끄럽다. 도마 대신 자판을 두드리며 지내는 쪽으로 내 삶이 옮겨왔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음식을 만드는 것과도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더 많다. 음식은 내가 먹기라도 했는데 글은 그럴 수가 없다. 대체로 글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자주 생각해본다.
얼마 전 좋아하는 시인이 쓴 구절이 마음에 남아있다. 그는 쓸모도 없고 별 심오한 의미도 없지만,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크으-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이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정초에 재미로 점을 보러 가서도 점쟁이에게서 돈 안되는데만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쓸모 없고 심오하지 않아도, 또 대체로 눈물이 질질 나는 글을 쓰고 있지만 예전처럼 앞으로가 막막하기만 한 기분은 아니다. 서툴지만 몸과 마음의 힘듦을 무시하지 않고 조금씩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엄마의 손을 떠올렸을 때 그것이 더 이상 아픔과 고통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비록 앞으로의 남은 생에 처방 중 가장 강력한 처방이라는 '엄마손 약손' 처방을 받기는 어렵게 되었지만, 엄마는 그 손으로 우리를 먹이고 길러 세상으로 내보냈다. 나는 엄마의 새끼들 중 가장 잘나지는 않아도 크게 사고 치지 않고 제 밥그릇을 채우며 그럭저럭 살고 있다. 내게는 말한 적 없는 양육의 보람 비슷한 것을 어쩌면 우리 엄마도 조금은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힘들고 우울할 때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