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주연의 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연 Jun 12. 2021

3월 12일의 기록 그리고 오늘.

 오늘은 울면서 아침을 맞았다. 얼굴과 베개가 온통 눈물범벅이다. 내 목소리에 내가 깨는 기분은 대체로 끔찍하다. 그 목소리가 우는 소리인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떤 희망이나 괴로움도 없고 그냥 무념무상에 가깝다. 누군가 보고 싶은 마음도 애틋한 마음도 모두 사라졌고 빛 한 줌 들지 않는 방에서 눈을 뜨는 것도 이제 익숙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먹으려고 생각해 둔 냉동고 속 마지막 베이글이 사라졌다. 베이글과 함께 먹을 크림치즈도 딱 한 회 분이 남아 있었는데. 내 블루베리 베이글.. 누구의 뱃속으로 갔을까.


보고 싶은 대상이 사라지는 일은 은근히 자연스럽다. 회색도시에서 살면 그리운 마음으로만 살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임해도 달라지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을 깨달으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시덥한 걱정 또한 멈추게 된다.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대단한 믿음이 아니라도 적당한 믿음과 불안을 동시에 갖고 사람을 대하니 덜 두렵다. 이제는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출처 없는 자신감이 돋아난다. 대신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원망을 듣게 되기도 하지만 그건 잠시고, 내 마음을 챙기는 것이 더 우선이라 한 발짝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온통 새하얀 카페에 갔다. 꿈에서의 일이다. 당신과 내가 함께 앉아 커피를 홀짝인다. 온통 새하얀 그곳에서 색이 있는 것은 오직 당신과 나뿐이다. 하얀 옷을 맞춰 입은 여자 둘이 걸어 들어와 나에게 당근 주스를 뿌렸다. 당신은 입이 없어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제발 그만 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주스가 사방으로 튀기며 주황으로 물들었다.  하얀색 바지와 운동화에도 온통 주황색 물이 들었다.  없는 외출용 옷이 더러워지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엉엉 울었다. 이것  보라고!  아무 말이 없냐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당신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입이  잠긴 채로 고장나버린 지퍼 같아서 나는  엉엉 울었다. 화를 내야  상대를 잘못 정했지만 그런  별로 중요하지가 않아진다. 이미 화를 냈다는 사실을 무를  없기 때문이다.


-------------------------------------------------


꿈에서의 일을 말할 때 나는 사뭇 진지해진다.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잘 구분되지 않고 때때로 그것이 꿈보다도 끔찍한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데자뷔 같은 단어를 떠올리면 무얼 하나, 현실이든 꿈이든 바뀌는 것은 크게 없고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며 복합적 의미로의 미친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 뿐이다. 그 미친 사람들의 범주 안에 내가 속해질지 아닐지가 중요할 뿐이다. 일반적인 사람으로 평범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3개월 동안 다닌 학원 수업이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다. 전공자도 아니고 미적 감각도 없고 결정적으로 통장잔고도 얼마 없는 내가  일은  하고 계속 학원들만 들락거리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학원에 다니는 동안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만두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장 학원을 그만두고 다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까도 여러 .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나보다도  인생을 걱정하는 오지라퍼들이 아직도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때문이다. 일을 하던 때도 주말이나 평일 저녁에 시간을 내어 종종 학원 다녔다. 아무런 압박감 없이 오로지 배움만을 위해 배우는 과정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에세이 수업과 소설 입문, 플롯과 시나리오 입문, 교정교열을 거쳐 포토샵, 일러스트, 인디자인까지.


이번에 다니는 학원은 국비과정으로 배우는 수업이라 3개월 동안 3개의 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우고, 중간중간 7번이나 시험을 쳐야 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학원에 나갔다. 어리고 빠릿한 젊은 학생들 사이에 앉아 버벅대며 컴퓨터를 배웠다. 원대한 꿈이나 취업에 대한 열망은 없었지만 얕은 복수심과 그보다는 조금 깊은 배움에 대한 아쉬움이 합쳐져 매일 6시간씩 나를 컴퓨터 앞에 앉아있게 했다. 물론 그러는 동안 글은   줄도 쓰지 못했다. 그리고 그냥 보면 조금 웃음이 나오는 포트폴리오를 최종의 최종의 최종을 반복하며 무한 수정 중인 상태다. 포트폴리오라니, ! 내가 포트폴리오라니..!


얕고 넓은  지식들이 얼마나 소중하면서도 보잘것이 없는지, 대체 무엇이 되려고 이리저리로 손을 뻗고 다니는지는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자면 나는 당장에 출판사에 취업을 해야만 한다. 사실 그러자고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었다. 하지만 배움이 더해질수록 높은 벽을 실감하는 순간들도 자주 생겨났다. 전공자가 아니며 4년제 대학을 나오지도 않고 학원들만 전전한 내가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값은 거의 0 수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젊고 똑똑하고 좋은 대학과 풍족한 지지를 받으며 자란 인재들이 매일 세상으로 쏟아져 나온다. 반면에 나는 십수 년간 온갖 일을 하며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불신이 커진, 독이 바짝 오른 30대가 되어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노련함과 유연은 아직  없이 부족하다.


좋은 사람으로 살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꾸리는 일은 왜 이렇게도 어려울까. 그런 생각이 들 때 내 앞의 선구자들을 생각해본다. 그들은 책으로 나를 가르치고 꾸짖는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사람들이 내가 알고 있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그들의 말은 왜 이렇게 쉬우면서도 어려운가. 아마도 말은 쉽고 실행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모두 실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얄팍한 위안을 삼아 본다.


3단 리플릿 수정 작업을 위해 큰 마음을 먹고 카페에 왔는데 오래된 노트북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노쇠한 그는 부단히 애를 썼지만 학원에서는 잘만 열리던 일러스트 파일을 여는데 실패했다. 대신에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게 했다. 언제 전사할지 모를 오래된 이이를 살살 달래며 글인지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를 주절거림을 또 하나 뱉어내었다. 오래된 옛 노래를 흥얼거리며.


변진섭 -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https://youtu.be/lxtv3nEgido


영화 랍스터 온라인 퍼블리셔 (개인작업)

https://indd.adobe.com/view/39065611-e203-4cfb-a659-7acbee54c91b


매거진의 이전글 이사의 역사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