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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un 28. 2021

이사의 역사 3

경희는 다행히 점차 활력을 찾아갔다. 아무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등을 떠밀어 내려간 그곳의 생활이었지만, 막상 끝이 다가오니 나는 그저 하릴없이 고향에서 비비적대는 한심한 청춘이 되어있었다. 


스무 살부터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오던 노동을 멈추고, 간병을 위해 고향에 머무른 사람에게 주는 이름 치고는 무척이나 잔인한 타이틀이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기도 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만 했다. 도시의 무서움에 코를 베이고 마음이 할퀴어지며 나는 다시 스스로 노동을 하고 돈을 벌어야만 했다. 사람의 가치를 경제력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무한경쟁시대에는 제법 확실한 기준이 되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가진 돈을 거의 모두 사용하고 내게는 남은 돈이 없었다. 도시에서 다시 시작할 돈이 없었다. 45만 원을 들고 서울에 와서 고시원에 살던 몇 년 전 일이 어쩐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1년 동안 보증금 1000만 원을 모을 때까지 언니의 신혼집에 들어가 살기로 하고 서울 끄트머리에 붙은 오래된 군인아파트로 짐을 부쳤다. 


나는 6개월 만에 다시 노동의 세계로 돌아왔다. 잠실에 일자리를 구하고 매일 12시간 동안 노동하며 돈을 벌었다. 그래도 한 달 급여는 13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홀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는 애들보다도 실수령액이 적은 달도 있었다. 그때의 주방 일이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주방에서 막내로 일을 하면 정말 정말 돈을 못 벌었다. 매일 땀에 절여지며 불 앞의 노동을 견뎌도 쥐어지는 것이 정말 터무니없던 시절이었다. 왜인지 이대로 이렇게 돈을 못 버는 사람으로 늙어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상상을 하곤 했다. 그래도 나는 음식 만드는 것이 좋았다. 동네 양아치 같은 애들이 건들거리며 서빙을 해도 나는 흰 행주를 들고 쫓아나가며 내 음식에 제법 정성을 쏟았었다. 


그렇게 종종거리며 브런치 식당에서 6개월을 일해 같은 회사에서 운영하는 다이닝 주방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주방 안에 스테이크를 보관하는 워크인 냉장고와 2층으로 음식을 올리는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곳이었다. 영업이 끝나면 드라마 촬영을 하고 주말이면 유명한 사람들이 스몰웨딩이나 돌잔치 같은 걸 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근무지를 옮긴 후로는 불 앞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당시의 나는 목소리가 크고 또렷한 편이었고, 책임자는 발음이 조금 어눌하고 첫 단어를 더듬는 편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몇 번 그의 일을 도와주다 보니 어느새 주문서를 체크하며 코스 순서에 맞춰 음식을 내보내는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한동안 대단한 일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사실 내가 없어도 식당은 잘만 돌아가는데 그때의 나는 그걸 몰랐다. 


급여가 올라도 같이 일하는 오빠들보다 한참이나 적은 돈을 받았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사람이 나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는 걸 알게 되니 묘한 배신감이 일렁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실수를 하면 더 아니꼬워 보였다. 책임자가 데려온 '아는 동생'인 그는 주방에서 일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로즈메리와 타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내였다. 그런 사람을 데리고 샐러드와 디저트를 만들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무리 일을 알려줘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단순히 그가 낙하산이라서가 아니었다.


스마트 폰이 본격적으로 공급되며 열에 아홉은 카카오톡 메시지가 오면 아기 목소리로 카톡! 하고 알람을 설정해두던 때였다. 나는 아직 스마트폰을 사지 않았고, 그는 매일 내 옆에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주방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같은 파트도 아니고 정작 본인들도 쉬는 시간에는 그가 틀어주는 유튜브의 야한 뮤직비디오를 함께 즐기던 사람들이니 그를 따끔하게 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시시각각 울리는 카톡 알람에 위태롭던 내 이성의 끈은 결국 끊어졌다. 나는 도저히 그와 함께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해 퇴사를 결심했다. 책임자는 나를 붙잡지 않았고, 나는 그날 부로 퇴사처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방관했고, 책임자는 책임감이 없었으며, 그는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어렸고, 많은 부분에서 미숙했다.


일을 그만두는 것에 병적으로 알레르기가 있던 가족에게 나는 퇴사를 알릴 자신이 없었다. 나를 또 천하의 한심 덩어리로 볼 그 눈빛을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 넘게 출근시간에 맞춰 집에서 나와 카페나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새로 일할 곳을 빨리 찾아야 했다. 이곳저곳으로 되는대로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4년제 대학을 나와 취업준비를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았지만 나름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나는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번화가에 우뚝 솟은 외국계 호텔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25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인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온갖 레스토랑이 있었지만 내가 배정된 곳은 지하 2층의 뷔페였다. 한 끼에 9만 원이 넘는, 6시 조식부터 마지막 디너타임까지, 하루에 16시간 동안 오픈된 공간이었다. 나와 함께 입사한 다른 여자 인턴은 내가 중학교 때 신문지를 오려 스크랩해둔 외국의 요리학교 출신이었다. 그녀는 꼭대기 층의 레스토랑으로, 나는 지하 2층으로 배정되었다. 간혹 그녀와 마주칠 때면 나는 이상한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그녀는 그곳의 신입 루키 같은 느낌이었다면 나는 지하 2층의 부엌데기 같은 느낌이랄까. 매일 몸보다 큰 3단 렉을 밀고 지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냥 똑같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무조건 고개를 조아릴 때, 내가 머리를 조아리는 상대의 뒤 편에서 아이스커피를 홀짝이며 따라 걷는 그녀를 볼 때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그녀와 그녀의 일행들을 위해 길을 내주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출근하고 주방 일 보다 어려운 뱃사공들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90만 원이 급여로 들어왔다. 정직원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2년을 다 채우고 그만두는 인턴은 거의 없기도 했고, 2년을 채우면 계약이 종료되어 정직원이 되지도 않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손님들에게는 개인 생수를 제공하는 곳이었지만 지하 2층의 인턴들이 마실 물은 없어서 수돗물을 마셨다. 화장실에 자주 갈 수 없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마저도 먹지 않았고, 생리를 하는 날은 여분의 속옷을 챙겨 다녀야 할 정도였다. 


그곳에 일하면서 좋았던 것은 내가 그곳에 다닌다고 말하는 아주 잠깐의 시간 말고는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또다시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솟구쳐 매일매일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쉬는 날에는 바득바득 프랑스어 학원에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영원히 지하 2층을 부엌데기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 나는 새벽 4시 반에 버스를 타러 집을 나서는 일상에도 조금 익숙해졌다. 그즈음 언니 부부에게 첫 아이가 찾아왔고, 나는 또다시 이사를 계획했다.


지하철을 타고 한 번에 출근을 할 수 있는 동네이면서 비싸지 않은 곳을 찾으며, 서울에 와서도 단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던 동네에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노선을 타고 집을 보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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