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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Mar 04. 2024

산타바버라로 오세요

산타바버라로 오세요


천사들의 도시 로스엔젤레스에 가시면 꼭 산타바버라로 놀러오세요

자동차로는 1시간 30분 거리지만 웬만하면 1시간 더 걸린다는 암트랙 기차를 타보세요


우리는 2월 23일 유니언역에서 오전 9시51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탔답니다

출발시간은 적혀있는데 도착시간은 찾아볼 수 없는 유령의 기차표를 가지고

10-B 탑승구까지 헐레벌떡 뛰어 겨우 샌프란시스코행 객차 앞에 다다랐습니다


역무원은 우리 티켓을 받더니 2층 39, 40번 좌석표를 종이에 써서 주었습니다

순간 40년 전 대학 신입생 MT때 청량리에서 강촌행 기차를 탔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아무튼 해변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좌측 좌석을 끊고서 출발을 기다렸습니다


정시에 기차가 유니언역을 출발하자 승무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습니다

종이에 적어서 준 좌석표를 확인한 후 선반 틈새에 끼워 넣는 승무원

열차표를 바코드리더기로 검사하는 줄 알았더니 휴대폰 카메라로 찍는 승무원

중간중간 커다란 비닐봉투를 들고다니며 쓰레기를 회수하는 승무원


마치 시간여행연구소에서 나온 직원들 사이로 쉴 새 없이 나오는 방송

“레이디스 앤 젠틀멘~”으로 시작하는 목소리는 어김없이 

런치 메뉴가 준비되어 있으니 서둘러 예약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략 10분 마다 한번씩 흘러나오는 식당예약 호소는 나중에는 절규에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예약자가 거의 없었는지 아예 기차는 거의 거북이걸음으로 기다시피 했습니다

유니언역에서 La 내륙지역을 빠져나가는 데만 거의 1시간 30분을 소비했습니다

하도 궁금해서 식당칸에 가보니 정말로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다 해변에 가까운 옥스나드역을 지나자마자 기차는 내달리기 시작하더군요

벤투라역을 거쳐 산타바버라역까지 바닷가 풍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해안선에 줄지어선 캠핑카, 저 멀리 섬과 그것을 이어주는 다리, 그리고 선박들

런치 메뉴가 안 팔리는 이유를 대충 알 듯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산타바버라역에 도착해서 다운타운으로 걸어갔습니다

굴다리를 지나자 보이는 스페인풍 하얀 건물들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크루저리’라는 식당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한 뒤 

2월의 따스한 태양 아래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잠시 화장실에 들렀는데 이 가게가 1800년대에 지어진 건물자리라는 설명이 붙어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건물 앞 간판에 Since정조대왕이라고 크게 적어놨을 텐데요

가게 안 TV에서 샌디에이고:다저스 시범경기를 중계하고 있어서 잠시 봤습니다

티켓을 잘못 구매해서 400불 가량을 날린 경기여서 쓰린 속을 달래야만 했습니다


대법원 건물이 유명하다기에 가보니 1층에서 보안검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샀던 향수가 문제가 되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하기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영어가 안 되니 손짓발짓 하다가 결국은 직원이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하기에 코리아라고 했더니

구글번역기를 한참 찾더니 우리에게 화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문구를 보고 기절할 뻔 했습니다


“당신은 이곳이 위험하니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부동산에서…”


아마도 우리 소유물인 향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프로퍼티를 부동산으로 번역한 것 같았습니다

졸지에 우리는 대법원을 보러 갔다가 부동산 아저씨에게 쫓겨나고야 말았습니다

그 부동산 건물 꼭대기 종탑에 올라가서 시내 전경을 보려는 계획은 그렇게 물 건너 가고 말았습니다


톤디 젤라토라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잠시 쉬었다가 시간에 맞춰 산타바버라역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6시19분 기차를 타기 위해 30분 전에 도착해서 기다렸습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 둘이 같이 온 동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더군요

그때 동네 할아버지인 듯 가가멜처럼 생기신 분이 사진을 찍는 청년들 곁으로 다가가 추임새를 넣었습니다


“원 투 쓰리 슛!”


청년들을 따라다니며 촬영 타이밍을 잡아주시는 것을 보니 왕년에 영화감독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기차가 저 멀리서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아직 도착 예정시간보다 20분이나 이른 시간이어서 La행 기차가 아닌 줄 알았는데 맞았습니다

표 검사하고 객차 배치하는데 시간이 20분 가량 걸리더군요. 또 La 가는 손님이 타는 객차는 별도로 있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기차에 오르자마자 기관사는 최고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미 디너 예약시간은 지나서 그런 듯 했습니다. 그 때문에 하마터면 유니언역에서 내리지 못할 뻔 했습니다. 원래 도착 예정시간보다 40분 빨리 왔기 때문입니다.


갈 때는 3시간 30분, 올 때는 2시간 걸리는 환상의 산타바버라행 암트랙 기차여행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 없이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표정들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주에 이런 시간여행을 하는 기차가 있다는 것이 21세기의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하루 당일치기 기차로 인생 최고의 여행을 즐겼습니다


여러분, 삶이 지지부진하고 잘 안 풀릴 때 산타바버라행 암트랙을 타세요

도착시간은 런치 예약율 여부에 따라 비둘기호가 되거나 KTX가 되는

공항에서도 통과되는 작은 향수 하나 때문에 부동산에서 바로 벗어나야 하는

팔순의 할아버지가 청년들을 위해 손수 사진촬영을 거들어주는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곳 산타바버라행 기차를 지금 타세요


“원 투 쓰리~ 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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