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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Mar 11. 2024

거룩한 중지

거룩한 중지


공사현장 몇 군데 들렀다가

숙취해소에 좋다는 조개칵테일이 있다기에

아침부터 또 술인가 싶었는데

엘살바드로 사람들이 여는 시장에서

친구가 비닐봉투에 뭔가를 잔뜩 담아왔다


무슨 맛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교차로에 차를 세우는 순간 밖이 소란하다

 작은 남미계 홈리스 아저씨가

앞차와 실랑이를 하다가 퍽 소리를 낸 것이다

정차한 차에 적선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데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그 소리가 하도 찰져 고개를 돌려보니

가우초 망토 비슷한 것을 걸친 아저씨는

자기 머리 위로 피뢰침 같은 손가락을 올린 채

물위를 걷듯 베니스대로를 유유히 걷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빳빳이 세우고

물동이 인 처녀처럼 아주 다소곳하게 걷는 모습이

마치 부활절 성당에 들어서는 초보 신부님이거나

십자가를 머리에 이고 언덕을 오르는 성자처럼 보였다


집에 와서 시큼달큼한 조개 칵테일을 먹다가

방금 보았던 거룩한 중지가 떠올라 관자놀이가 괜스레 시큰해졌다


가우초는 가축을 돌보는 목동

비록 가진 것 다 내주고 망토 하나 남았으나

내 어린 양들을 위해 중지를 모아 기도하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는 소리가 자꾸 들려 밖을 내다보니

벨라와 아치 짓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그 위를 커다란 나무배 하나가 출렁이며 가고 있었다


이제 다 이루었다, 이제 다 이루었다 하며

양떼구름 몰며 서쪽하늘로 천천히 옮겨가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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