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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져니박 Oct 30. 2023

퇴사하고 싶은 날의 오후

관계, 가을이 오는 신호

퇴사하고 싶은 날의 오후


이번 주 주제어가 가을과 닮았다고 생각이 든다. 몇 달, 혹은 몇 년을 눌러왔던 분노, 실망, 허탈 등 감정이 일순 '퇴사하고 싶다'라는 의지로 농축되는 그날의 오후라니.

(INFP인 나를 비롯해서) 일에 대한 욕심도 어느 정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싫고 그렇게 달려온 사람들에게 '퇴사하고 싶다'라는 표현은 쉽게 튀어나올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하고, 때로는 야근과 주말 근무를 불사하며 최선을 다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스스로 또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기 위해 버티고 또 버틴 뒤에 갑자기 새어 나오는... 그동안의 감정이 집약된 폭발이다.

마치 삼사십도 넘는 열과 성을 다해 몇 사람을 쓰러뜨린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끝나지 않을 기세로 대차게 태풍과 장마까지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 찾아온 가을이다. 가을은 그 어느 계절보다도 원색적이고 농축적이다. 높이 솟아버린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떨어지기 직전까지 가을 단풍은 점점 새빨갛게 불타오른다. 봄의 꽃과 달리 더 크고 더 화려하다고 관심을 받고 수분에 성공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출처 : Unsplash의 Rula Sibai



막연한 존경 그리고 두려움


취업은커녕, 수능과 대입, 아니 교복조차 입어본 적 없는 초등학생 시절이 있었다. 나와 동생, 사촌들 모두 어릴 때, 추석 연휴면 으레 성묘와 제사와 놀이들 외에도 어른들의 고돌이 내기가 있었다. 블랙 앤 화이트의 트럼프 카드보다, 작고 빳빳한 빨간 테두리의 화투 카드가 주는 '으른들'의 아우라가 있었다. 무조건 카드 여러 개 나오면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쌌다!'라는 외마디 외침에 돈을 뺏기는 것을 보며 참 쉽지 않은 게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뭐, 나를 비롯한 애들은 각자 자기 아빠를 배신하고, 숙부든 할아버지든 그때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 옆에 가서 파이팅을 했다. 돈을 가장 많이 딴 어른이 그날 아이스크림을 크게 쏘는 분이었으니까.  

한쪽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으른들'은 연휴가 길어서 다행이라니, 요즘 경기가 안 좋다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다니 이야기를 나누었다...막연한 존경 그리고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어른들의 일, 회사라는 것은 혼자 열심히 한다고 100점 맞는 게 아니구나, 열심히 하다가 오히려 일이 몰리고 '싸고' 힘들어지는구나.  나도 언젠가는 공부하는 학생의 신분이 끝나고 돈을 벌고 일을 해야 할 텐데.


출처 : Unsplash의 Meg Boulden
여전히 관계의 시작도 끝도 두렵지만


그 철없던 아이는 그 막연한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인 직장인이 된 지 벌써 6년이 되었다.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100점을 맞는 학생 신분을 떠나 직장인이 된 것이다. 스스로가 장하다. (물론 공부도 어려웠다. 열심히 달리다 보니 똑똑하고 뛰어난 집단에 들어가서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쟁 속에 공포의 조별과제를 몇 번 거치면서 A를 받기까지 많은 우연과 좋은 인연이 겹쳐야 한다는 것도 학습하게 되었다.^^)


6년 동안 이직도 두어 번 했다. 두 번 모두 직'장'만 옮긴 것이 아니라 직'군' 즉 업, 내가 하는 역할을 바꾼 상황이다. 누군가는 '어떻게 2년 만에 A에서 B로 직군을 바꾸게 되었어요?'라는 질문을 하겠지만, 그 반대이다. 그만큼 심사숙고하고 어렵게 내린 결정이다. 이 회사의 비전이나 조직이 마음에 안 들어 떠나겠다! 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더 잘 해낼 수 있고, 또 잘 해내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을 한 뒤의 이직이자 전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곳을 떠나는 것도 어려웠고, 다음 곳에 적응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다음 회사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매우 자명하다. 새로운 회사와 조직에 적응하는 것과 동시에, 이 직군 즉 역할에 대한 기대치를 조정하고 내가 회사와 나 스스로에게 옳은 판단이었다는 증명을 해야 했으니까.  그럼 떠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은 왜 그랬을까? 대안이 여러 개 였으니까. 실제로 이전 두 회사 모두, 나의 성장과 역량에 대한 고민을 듣고, 퇴사 면담 시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내부 보직 이동을 권하기도 했다.

'우리 회사에 OO팀/TF가 있다. 이곳의 팀장/상무랑 이야기해 보고, 한 번 여기서 본인이 직접 경험해 보면 어떨까?' 감사한 제안이었고, 성과뿐 아니라 나의 태도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셔서 또 감사했다. 그러나 비슷한 일이어도 '바로 그' 일은 아니었기에 완곡하게 사양을 했다. (역시 생각 많은 MBTI N은 힘들어...)


역설적으로 회사와 나,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의 시작도 쉽지 않고 끝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 관계 안에서 나의 역할을 다하고 있을 때는 - 존중하며 버티는 근육이 생겼다. 그 힘듦이 대외적인 환경이든, 프로젝트 또는 회사의 비전이든, 얼음장을 걷는 것 같이 살 떨리는 일정이나 관계의 문제이든, 건강 문제이든 말이다.


출처 : Unsplash의 Cytonn Photography
퇴사하고 싶다면, 신호와 소음을 잘 구별하기


'퇴사하고 싶다'라는 외마디가 아무 일도 없었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혜성 같은 존재는 (적어도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아니라고 글 앞부분에 적었다. 그리고 회사가 열심히 붙잡고 있어도 이내 툭 떨어질 정도로 새빨갛고 무겁게 불타오르는 퇴사에 대한 갈망 역시, 그 초록색이던 잎이 서서히 매운맛으로 물든 결과이다.    


'요즘 힘드네',..., '쉬고 싶다',..., '퇴사하고 싶다',..., '당장 때려치워!' (스펙트럼을 이루는 단계의 개수와 농도차는 다들 다르다)


스스로는 잘 몰랐는데, 주변에 이직하고, 퇴사하고, 아예 창업에 뛰어드는 친구 및 지인들을 보다 보니 퇴사에 대한 시그널이 그 빈도와 강도는 다르지만 감지가 되었다. 술이나 게임에 의지하는 시간이 늘어나거나, 자도 자도 항상 피곤해하거나, 출근하고 제일 처음 하는 일이 채용공고 보는 거라든가, '나도 한번 옷 떼다 팔아볼까'라며 요즘 에이블리나 무신사, 스마트스토어에 무슨 상품이 잘 팔리는지 분석하고 있거나...


음, 다시 생각해 보니 신호도 있었지만 불협화음, 소음도 있었다. 당장 이직을 위해 이력서나 포트폴리오도 업데이트하지도 않고, '퇴사하고 싶다' 생각만 하는 사람들. 내가 이 회사, 이 조직에서 불편하거나 불호인 부분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파고들고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는 '퇴사하고 싶다' 생각만 하는 사람들. 오히려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본인만의 기준이 세워있지 않아 포기하게 되는데 - 그렇게 붕 떠 있는 마음으로 일한 만큼 현재 직장과 조직에서의 몰입이나 성과도 불만족스러운 이도저도 아닌 상황.


그래서 나 스스로나, 내가 아끼는 사람의 신호와 소음을 잘 탐지하고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실행에 옮겨야 할지, 언제 마음을 다잡아야 할지 조금이라도 나은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나 부사수의 것도 잘 지켜보자. (갑작스러운 동료의 퇴사 소식에 휘둘리지 않으려면ㅠㅠ)

출처 : Unsplash의 Denisse Leon


올해는 단풍이 예년보다 한 두 주 더 소식이 늦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 두 명 발 빠르고 의심 없는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에 올린 단풍 명소 사진, 해시태그를 보고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뒤늦게 몰려 산이면 산, 궁이면 궁, 공원이면 공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언제 이렇게 다 단풍이 들었지?'라고 뒤늦게 반문하기 전에 미리 가을이 오는, 잎이 새빨갛게 불씨를 틔우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아직 단풍 절정 아니야, 다음 주말에 가자'라고 끝내 가을이 오는 신호를 무시하다가 가을비에 낙엽이 모두 지고 난 뒤에 가지는 말아야지.



져니박 씀.


커버 출처 : Unsplash의 Rula Sib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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