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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유코치 티아라 Mar 17. 2022

남아선호 사상의 할머니

고려장을 하더라도 아들이 좋다고 이야기하신 할머니..

엄마의 시집살이도 동생의 구박도 그 시작은 남아선호 사상의 할머니 셔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유독 남자 아니 아들을 좋아하신 할머니 셨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할머니는 손재주가 좋으셨다. 그중 바느질을 진짜 잘하셨는데 

바느질을 좋아하셔서 그런지 집에 온갖 색의 천들이 많았다. 


할머니께서 앉아 바느질을 시작하면

밥상 보자기도 뚝딱! 복주머니도 뚝딱! 

우리가 심심해할 때면 콩주머니도 뚝딱 만들어 주셨다. 손으로 하는 바느질도 잘하셨지만 

미싱도 곧잘 하셨다. 좌식 미싱이 있었고 [ 이건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돌돌돌 돌아가는 소리가 참 좋았었다. 


아무튼 저 솜씨 좋은 바느질로 뭐든 만드셨는데..

나와 동생은 6살 차이가 난다. 엄마의 말로는 엄마 아빠가 너무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자가 목표였는데 

아들을 낳으라는 할머니의 시집살이도 힘들었고 하나보단 둘이 덜 외로울 것 같아서 

동생을 가지셨다고 했다. 

아들을 낳아야 시집살이가 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장남한테 시집와서 

대를 끊냐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 엄마는 누구보다 아들을 원하셨다. 

병원에 갈 때마다 초음파를 볼 때마다 확인 또 확인을 하셨다. 

매번 확인할 때마다 의사 선생님이 아들이라고 하셨기에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우리 가족 모두가 철석같이 믿었다. 

할머니는 꿈에 그리던 아들 손자를 만나기 위해 직접 배넷저고리면 속싸개 

아기 이불세트까지 바느질로 하실 수 있는 건 바느질로 다 만들어 준비하셨다. 

할머니가 손수 하늘색 천을 고르고 솜을 사서 바느질을 하던 게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할머니는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아빠의 아들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하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동생이 태어났는데 딸이었다. 공주님 이였던 것이다. 

예전의 초음파는 지금처럼 정확도가 높지 않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일이었다. 


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바느질로 만든 모든 배넷저고리며 속싸개, 아기이불을 꽁꽁 싸서 비닐에 넣으셨다

그리고는 장롱 안 제일 깊숙한 곳으로 넣으셨다. 

아들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만든 것이기에 

감히 딸내미는 그것을 쓸 수 없는 것이었다. 

둘째도 딸을 낳은 엄마는 출산 후 집에 와서도 눈칫밥을 드셨다. 

할머니는 미역국 한 번을 끓여주지 않으셨고 산후조리는 없었다. 

그렇게 엄마의 시집살이는 계속되었고 태어나자마자 동생은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할머니가 손수 만들었던 손자를 위한 용품들은 

작은 아빠가 첫째 아들을 낳았을 때, 비닐에 싸져 곱게 포장된 채로 전달되었다. 

할머니가 손수 다시 세탁해 입혀주고 눕혀주고 했다. 


우리 집안에서의 첫 손자 

작은 아빠의 첫째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집 서열은 아빠가 1위 첫 손녀인 내가 2위 첫 손자인 작은 아빠 아들이 3위였다. 

그다음은 없었다. 아니 할머니 눈과 생각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같은 여자로, 여자들보다 남자들을 좋아하는 할머니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느 날 할머니와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고려장이 나왔다. 

그걸 본 내가 할머니에게 질문을 했었다. 


"할머니는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아빠가 할머니 모시기 힘들다고 

드라마처럼 할머니 산에 갖다 버리면 어짤끼고? 그래도 아빠가 좋으나? "


할머니는 조용히 하라며 


" 너희 아빠가 그럴 땐 다 이유가 있는 거다. 할머니는 아들이 내리 갖다 버려도 

아들이 이 세상에서 최고다. 아들이 버려도 난 괜찮다. "

라고 이야기하시는데 


그때 느꼈던 것 같다. 

아... 아들을 이길 수 있는 건 없겠구나 


아무리 엄마나 내가 그리고 동생이 할머니를 잘 보필하고 모시고 챙겨도 

우리 그냥 여자일 뿐이다. 

남아선호 사상의 할머니 눈엔 그저 신경 쓰이는 존재가 아니고 우리가 뭐라고 한들 

눈 하나 깜빡 안 하실 분이라는 게 느껴졌다. 


할머니에게 제일 중요한 건 아빠와 손자였던 것이다. 그 사실은 돌아가실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이해는 가지만, 이 문제로 인해 우리 가족은 아니 우리 집안은 한참을 시끄러웠다. 


친정엄마도 아들을 낳지 못했고 

나도 딸만 둘 낳은 엄마라 

아들의 귀함과 좋음은 공감이 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맘 속에 박힌 한 가지! 

시집을 가면 꼭 아들을 낳아야 시집살이를 안 하겠구나... 이 문장이 어릴 때부터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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