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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Jun 22. 2021

흰지팡이

2021년 5월 21일



엘리베이터에 다가서자 문이 거의 닫혀갔다. 안에는 아주머니 한분이 타고 계셨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의 걸음은 빨라졌고 몸짓은 그보다 더 과장되게 빨리 가는 척을 했다.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열림 버튼을 눌러주셨다. 사실 그런 추한 액션을 보이지 않아도, 친절함 덕에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을 것이다.



지하철 역 엘리베이터라서 문이 굉장히 천천히 닫힌다. 닫힘 버튼은 기능하지 않고, 열림 버튼을 누르면 다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닫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눌러준 아주머니께 감사했다. 나였으면 속으로 '제발 아무도 오지마라'며 기도를 하고 있었을 텐데. 아주머니도 속으로는 그랬을지 모른다. 아니다. 아닐 확률이 높다. 눈이 마주치고 버튼을 누르는 데까지 거리낌이나 아쉬움이 없으셨다. 나는 부끄러워하며 층을 올라갔다.



사실 부끄러워야 할 게 그것만이 아니지 않은가. 젊은 청년이 버젓이 옆에 계단을 놔두고 굳이 엘리베이터를 탄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그 계단이 너무나도 길고 높으며 빙빙 돌아가야함에 그랬다해도, 그날따라 너무 많이 걸어서 발목이 지끈거렸다해도 어쩔 수 없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선택한 편리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누군가의 편리를 빼앗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괜찮지 않나 스스로 반문해보았다. 하지만 마음에 여전히 걸리적거리는 물혹은 남아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마주한 보슬보슬 내리는 비는 그리 상쾌하지 않았다. 우산을 써야할까 말아야할까. 호쾌히 쓰지 않는다면 부질없는 마초성은 지켜지겠지만 찝찝해지는 것은 나였다. 꼬깃꼬깃 접힌 3단 우산을 폈다. 20m 앞에 위치한 정류장을 보니 아직 마을버스가 도착하진 않았다.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내 정면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우산이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듯 했다. 짚고 있는 흰지팡이는 자꾸만 건물 옆에 붙어있는 화단 쪽을 향했다. 화단 벽을 더듬으며 가는 사이 옷깃은 나무에 스쳐 촉촉히 젖어갔다. 어디까지 가시는 걸까. 우산을 씌워 드릴까. 이런 날씨에 시각장애인은 진짜 불편하겠구나. 1초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가며 내 고개는 그를 따라갔다.



'저기요.'



고개를 잠시 든 그의 입에서 나지막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분명하지 않았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을 제쳐내기 위해 나는 온 신경을 그에게 돌렸다. 그러자 다시 또렷히 들렸다.



"저기요."


"네. 도와드릴까요?"


"네. 지하철 타려면 어디로 가야하나요?"


"여기 앞에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그는 팔 한쪽을 내주었고 나는 살포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기에 우산을 씌워드렸다.



"여기 옆에 버스정류장도 있나보죠?"


"네 맞아요. 바로 옆에 있어요."



버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선 물어보셨다. 내가 타야할 버스였다. 마침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던 노인분들은 우리를 보셨는지 기다려주셨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약간의 오르막 경사가 있었다.



"여기부터는 조금 경사가 있어요."


"감사합니다."


"네 이제 타시면 돼요. 엘리베이터예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거푸 감사 인사를 건네던 그의 고개는 나에게 맞춰져 있지 않았으나, 틀림없이 나에게 하는 말이다. 어쩌면 귀의 방향이 나에게 향해 있었다.



그를 도와드리고선 나는 다시 그 짧은 길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고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땅을 유심히 쳐다봤다. 보도블록은 도저히 시각장애인 스스로 지하철 입구를 찾아가긴 힘들게 설계되어 있는듯 했다. 빙빙 돌아가는 계단도 그렇고 비까지 내리니 더욱 고되어 보인다.



부끄러웠다. 결코 그를 향한 연민은 없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시기 전까지 함부로 도와드리진 않으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끄러웠다. 나는 계단이 귀찮아서 엘리베이터를 탔고, 우산 쓰기 애매한 보슬비에 심기가 불편했다. 그게 부끄러웠다. 그렇게 한동안 그곳의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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