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단순히 말과 생각이 고정되어 남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 ‘달리는 개’를 재현해 그린 그림이 얼마나 실제와 닮을 수 있었을까. 가만히 있어도 실제와 최대한 가깝게 그리기 힘든데 달리는 개는 오죽할까. 결국 사진이 발명되고 나서야 달리는 개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다시 재현해 그린다면 원래 그리고자 했던 ‘달리는 개’를 실제와 가깝게 그려낼 수 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달리는 개’가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있게 됐다. 그전까지는 달리는 모습을 당연히 움직임으로 기억했다면, 사진으로 움직임을 포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달리는 순간의 형태를 인지할 수 있게 된 거다. 즉, 우리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달리는 모습과 옛날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달리는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이처럼 기록은 기록 이상의 가치가 있다. 기록으로 인해, 우리가 관념으로 한정되게 인지했던 범주를 확장하고 객관화할 수 있다. 기록이 없었다면 객관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누가 했던 말이든 어떤 사건이든 각자의 경험과 기억으로만 논해야 했을 거고, 그렇다면 힘 있는 누군가의 기억과 경험만 ‘사실’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기록으로 존재하는 객관 또한 권력관계를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기록이 없었다면 객관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최근 한 학회에 참여했다. 발표자 한 분이 대학에서 강의를 겸하시는 분이었는데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며 강사로서 느낀 점도 말씀하셨다. 본인의 강의가 영상으로 남게 되면서 언어습관이나 내용을 점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기록을 통해 본인의 주관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또한 나는 최근 여러 교수의 인터뷰 촬영을 편집할 일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을 옮겨적고 자막으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교수 혹은 연구자로서 정말 많은 글을 읽고 심지어 본인도 그만큼 적었을 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에, 인터뷰에서 각자의 언어습관이 여실히 드러났다. 말을 막상 글로 적으니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들은 예사였고, 말이 꼬이며 사실과 멀어진 표현은 잘라내야 했다. 여기서도 여지없이 느낀 것은 글과 말의 차이점, 그리고 기록의 특성이었다.
나도 글을 쓰며 비슷하게 느꼈다. 갖가지 이유로 도중에 지워버리거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메모장에 저장된 글이 꽤 많다. 글쓰기는 내 생각을 기록하는 방법이다. 적다 보면 가끔, 기록되고 있는 내 생각 자체가 별로일 때가 있었다. 보통 어떤 감정의 상태에서 글을 적으면 글은 빨리 써진다. 하지만 순간의 감정에서 비롯된 비합리적인 생각일 때가 있다. 감정을 덜어내고 생각을 가다듬어 글을 쓰더라도 막상 적어놓고 보니 별로일 때도 있다. 그런 글(생각)들은 과감히 지워진다. 그렇다면 올려진 글들은 합격한 생각들일까. 슬프게도 아니다. 올려놓고 며칠 뒤, 몇 달 뒤 다시 읽어보니 별로인 생각도 수두룩하다.
또 느끼는 것은 내 언어습관. 글을 적는 도중, 또는 적고 난 후, 글을 정리하게 된다. 표현이 모호하진 않은지, 혹은 너무 구체적이진 않은지, 누군가가 읽었을 때 이해가 잘 되는지, 혹은 너무 쉽진 않은지 해당 글의 의도에 맞게 다듬는다. 그리고 중복되는 표현, 불필요한 표현은 삭제한다. 내가 쉼표와 ‘사실’이란 단어를 정말 많이 쓰더라. 그리고 ‘~이지만, ~이다.’의 문장 구성을 정말 많이 쓰더라. 처음엔 정말 심각했다. 의식하며 글을 쓴다면 조금 줄어들었지만 급하게 쓸수록 반복되어 나타났다.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말을 할 때도 그런 표현을 정말 많이 쓴다는 거다.
우연히 이런저런 일과 관련해 내가 직접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신경 쓰지 않던 사이 누군가가 해당 영상을 캡처해 보내주었는데, 해당 장면의 자막에 ‘사실’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던 게 아닌가. 도저히 내 모습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인터뷰 전체를 찾아보진 않았지만, 캡처 하나에 조금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연히 캡처한 장면에도 저 표현이 있다니. 나는 왜 이렇게 ‘사실’이란 단어를 많이 쓰는가. 정말 사실을 말하고 있긴 한 걸까. 가급적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의 반영인가. 그게 곧 내가 사실을 말하는 것과는 얼마나 가까운가. 아니면 ‘통찰력 있는 척’하고 싶은 과시의 표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