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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Jun 26. 2021

질문다운 질문

2021년 6월 3일

며칠 전이었다. 어쩌다 보니 좋아하는 연예인을 직접 만날 기회가 생겼다. 유튜브 콘텐츠 촬영 일이었다. 촬영이 끝난 뒤 나는 짐을 정리했고 그는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실제로 그를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단 것만으로 충분히 영광이었다. 하지만 문득 든 생각은 오늘 이후로 죽기 전까지 그를 언제 다시 또 만나 뵐 기회가 있을까였다. 팬이며 응원한다는 말을, SNS 댓글들 중 하나가 아닌 직접 전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용기는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평생'이란 전제가 붙은 이상, 있지도 않은 수치심 따위가 행동을 방해할 리 없었다. 곧장 나는 당당하게 걸어갔다. 



"사실 제가 엄청 팬이거든요ㅠㅠ 혹시 사진 한 장만 찍을 수 있나요...?" 



너무 착했던 그는 '물론이죠'라는 환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매니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뿔싸. 평소에 연예인을 같은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는 행태, 예컨대 동의 없이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대거나 개인 SNS에 트로피 마냥 게재하는 그런 현상을 싫어하는 나였기에, 결코 사진을 찍어 어딘가에 올리고자 함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사진을 구실 삼아 팬이란 걸 밝히고자, 대화를 나누고자 함이었고 최대한 예의를 차리려는 마음에 무릎까지 굽히며 말씀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퇴근한 상태인데 나는 연예인으로서의 업무를 부탁한 것이었다. 집 가는 공무원 붙잡아 서류 떼어 달란 격이다. 더군다나 상대 입장에서는 나를 생판 모른다. 직업 특성상 어떤 식으로든 내가 직간접적 해를 끼칠 수도 있었다.



나는 죄송스럽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이미 사진을 찍어주려 곁에 와있는 사람에게 "혹시 실례되는 것 아니냐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실례 맞다'라고 말해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매니저는 대신 올리진 말아달라 부탁했고 나는 결백한 표정으로 당연 그럴 것이라 긍정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연예인은 연거푸 설령 그래도 괜찮다며 밝은 웃음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내가 그에게 건넨 질문 중, 질문다운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질문이 질문다우려면 대답하는 사람에게 자유가 있어야 한다. 사진을 찍을 수 있냐는 팬에게, 이미 저질러 놓고 실례이지 않냐는 팬에게 그 누가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텐가. 심성이 까탈스러운 사람이라면 완강히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예외적 상황으로 자유를 판단할 수 없다.



결국 나의 질문은, 질문이라는 형식을 취한 압박에 가까웠다. 여기에 상황적 맥락과 질문자의 권위가 더해지는 순간 강요가 된다. 우리는 이때의 힘을 '위력'이라 부른다. 이미 사전 고지 없이 저지르는 중이면서 '괜찮지?'라고 던지는 질문과 '불편할 때 언제든지 말하라'며 창구를 열어놓는 것은 다르다. 초면에 나이를 묻고선 상대적으로 어린 상대방에게 '말 편하게 해도 되죠?'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리 나는 진심으로 물어봤다고 한들, 발화 상황과 발화자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질문다운 질문이라 할 수 없다. 의도로 정당화되는 게 대화라면 세상에 차고 넘치는 갈등이 왜 존재하겠는가. '거절할 수 있었잖아?'라는 입장이 왜 비판받는지 알아야 한다. 질문을 하거나 동의를 구할 때에는 상대방이 과연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상황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얻어낸 대답은 진실된 데이터라 하기 힘들다.



때때로 질문을 건넬 때마다 그런 종류의 질문이 뱉어져 등골이 서늘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걸러내기가 힘들다. 형식적인 질문은 말 그대로 형식일 뿐이다. 가게 사장님이 손님의 카드 싸인을 대충 손톱으로 긁어내듯, 사실 질문자가 스스로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과연 무슨 가치일까. 내가 그에게 혹시 실례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볼 때 이미 대답은 뻔했다. 문장 바로 뒤에 죄송하다는 말을 붙여 망정이지, 다시 사과할 기회가 생길 리 없다. 그런데 과연 죄송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기나 했을지.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수락할 수밖에 없는 요청을 드려 죄송했다고 제대로 사과를 하리라. 여러 이유로 그런 기회가 다시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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