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바운더리는 괜찮은가요?
자기 자신을 도와야 할 누군가에게
내게 답하는 스물한 번째 편지
21일 차 주제. '돕는 마음'
돕다: 남이 하는 일이 잘되도록 거들거나 힘을 보태다.
우리가 돕는다고 표현할 때 의미는 위에 해당할 것입니다. 오늘 글은 제가 ‘잘’ 돕지 못했던 경험과 한 책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도움에도 선이 필요해요
몇 년 전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저희 집은 기독교 집안,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시고 저 또한 그 영향으로 교회에 다녔습니다. 여느 성도처럼 봉사했고 교회 안팎에서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최선을 다해 도왔습니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남을 돕는 걸 몸소 실천하신 어머니가 계셨기에, 거기에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저 익숙했고 집의 연장선일 뿐이었지만 저는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때문이 아니라 이미 병들대로 병들어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내가 도와야 할 대상이 나구나 깨달은 이후 봉사를 멈추었고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왜 해를 당하는 상황에서까지 인내하며 희생하는 사람은 언제나 정해져 있는지, 왜 누군가를 돕는 행위가 혼자 끌어안아야 할 소진으로 끝나는 것인지. 맞닥뜨린 한계에 대한 물음에 펼친 책이었고, 제게는 해답에 가까웠던 심리학적 '바운더리' 개념을 일부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책을 읽게 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 필요한 부분을 언급한 것이며 그 어떠한 종교적 견해를 전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시중에 해당 책 외에도 ‘바운더리 심리학’을 다루는 서적이 있습니다.)
*바운더리: 사전적 의미로는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선, 한계선 등을 말하지만, 책에서 설명하는 바운더리는 ‘나는 무엇이고 내가 아닌 것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식하는 규정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수년 동안 소극적이고 고분고분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폭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중략)
그러나 실은 그들이 비록 수년 동안 순응하며 살아오긴 했지만, 그것은 그들 속에 억압된 분노가 일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바운더리 확립에 있어서 이와 같은 반발의 단계는 특히 살아오는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당한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
문제는 책임감의 바운더리가 혼동될 때 일어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운더리가 있음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증대시키고 우리 삶을 온전하게 이끌어 가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 정말로 이런 바운더리들은 우리의 마음을 적당한 수준으로, 우리가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고통 가운데 있지 않고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내’가 누구이며, 내게 부여된 책임의 한계는 어디까지고, 다른 사람들이 시작해야 할 부분은 어디부터인지 결정하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바운더리는 높은 벽이 아니다. (중략)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서도,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만의 공간과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각 구성원의 사유지는 통행이 얼마든지 허용되는 반면, 위험한 것은 절대 들어오지 못하도록 견고하게 지켜진다는 것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심한 학대를 받으며 자라면, 그 사람의 바운더리는 역기능을 수행한다. 그래서 나쁜 것은 속에 담아두고 좋은 것은 오히려 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메리는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온갖 학대를 받았다. 그녀는 좋은 바운더리를 세우려는 마음을 전혀 가질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고립시키고, 내면에 고통을 담아두었다. 그녀는 마음을 열어 아픔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고 그것을 자기 영혼으로부터 몰아내려 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녀는 그 아픔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외부의 도움을 받기 위해 마음을 열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그녀는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더 많은 고통을 지속적으로 ‘쌓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따라서 도움을 구하려 했을 때, 이미 그녀는 무수히 많은 고통을 지니고 있었고, 끊임없이 그 고통에 혹사당하며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게 ‘차단된’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이 지닌 바운더리 기능을 거꾸로 돌려놓아야 했다. 그녀는 나쁜 것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담장이 필요했다. 또한 이미 그녀의 영혼 속에 있는 나쁜 것은 몰아내고 그녀에게 필요한 좋은 것들은 필사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 담장에 문을 달아두어야 했다.
-헨리 클라우드, 존 타운센드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나와 타인 사이의 규정선, 바운더리라는 개념을 접한 뒤로 저는 제 바운더리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애쓰는 단계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도울 때 나를 먼저 살피고, 상대와 관계에 금이 갈까 봐 섣부르게 도왔던 이전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 즉 조심해서 돕기를 노력합니다.
'바운더리'라는 인식이 없을 때 저는 책임감과 이를 혼동해 상대의 어려움을 내 것처럼 생각했고 두 손 놓고 있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본문 예화 속 메리처럼 오랜 시간 남에게 나를 내어주었으면서 정작 저는 상대에게 아주 작은 것 하나도 부탁하지 못했습니다. 일방적이었고 병든 돕기였죠.
그렇기에 본문 내용처럼 억압된 감정이 폭발하는 반발의 단계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돕는다는 것 자체에 알러지가 생긴 것이지요. 그래서 더더욱 나의 한계가 이루는 '나'를 총체적으로 알고자 하는 지금의 시기를 지나야 합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한계에 대한 인식이 바로 서면 누군가를 돕는 데에서도 유연해질 것입니다.
도움을 거절해야 할 상황에서는 자책할 필요가 없고 도와줄 땐 내 상황을 고려해 가능한 선까지만 돕는 것이 건강한 선에서의 돕기라고 생각합니다. '바운더리'는 제가 도움 앞에서 겪었던 혼란스러움의 실체를, 극단에 치우쳐서 볼 수 없었던 균형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 고마운 개념입니다.
바운더리가 결여된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에, 저와 같은 누군가가 있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을 돕길 바랍니다. 자신의 바운더리를 굳건하게 세우길 바랍니다. 더는 내가 아픈 돕기는 하지 않길 바랍니다.
바운더리 세우는 중인 누군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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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여행 중,
내일은 스물두 번째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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