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10보단 둘 5씩 하는 게 즐거운걸요.
내게 답하는 스물여섯 번째 편지
26일 차 주제. '즐거움'
학생 때부터 낌새를 보였습니다. 책 네다섯 권을 쌓아놓고 매일 조금씩, 툭툭 건드리듯 여러 과목을 동시에 공부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하나만 하는 건 좀이 쑤셔 못했고 벼락치기도 못했습니다. 성인이 돼서는 그런 저를 모조리 망각해 버린 셈이었어요.
한 달 전, Erin and you 작가님께서 제 글에 남기신 댓글을 통해 김난도, <트렌드 코리아 2020> 키워드 중 하나인 '멀티 페르소나'를 접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나타나고 있는 많은 트렌드를 관통하는 동인은, “사람들이 자기 상황에 맞는 여러 개의 가면을 그때그때 바꿔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복수(複數)의 가면을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는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 즉, ‘여러 개의 가면’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멀티 페르소나는 말하자면 본서의 여러 트렌드는 물론이고 최근의 사회 변화를 이해하는 ‘만능키’라고 할 수 있다.
p.197, 「멀티 페르소나」 중에서
퇴근 전과 후가 다르고, 여러 취미, 일을 통해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현대인의 모습. ‘멀티 페르소나’는 이미 우리 삶에 익숙히 녹아들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누구나가 행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영상에서 '멀티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내용을 간략히 옮기면,
자기 정체성 표현 방식이 다양해지고 있다.
모드 전환이 빠른 현대인(컴퓨터에서 alt+tab을 눌러 화면 전환하듯).
연대는 느슨해지면서 고향, 출신 학교 등이 내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한다.
그럼 뭐에 맞게 규정하는가?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취향이 중요해졌다.
인터넷 공간에서 자기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
요즘 계정도 두 개다. 리얼 인스타, 페이크 인스타(린 스타, 핀 스타).
(이에 따라 소비 또한 양면적 소비 형태로 일어난다는 내용이 뒤따릅니다.)
체감한 변화가 이렇게 간단히 설명되다니 흥미로웠습니다. 이전부터 저는 한 가지 색을 띠지 않는 데서 오는 강박이랄지 자신감이 떨어지는 경험을 해왔습니다. 특히 커리어에 있어 '잘못되어가고 있다' 판단했습니다. 그건 (한 가지 분야의) 전문가 기준에 제가 미치지 못해 저평가된 영향이 컸지만, 근본적으로는 멀티 쪽 성향을 죽이는 형태로, 엄한 데서 옭아매고 버티며 효능감을 잃어가진 않았을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평생 어떤 일을 얼마나 거칠지 모르겠습니다. 무얼 하든 이제는 '나는 왜 이렇게 하나만 파지 못하지?' 문제로 의식하기보다, '나는 다층적인 사람!'이라고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 '멀티 페르소나'가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지각색의 정체성을 가졌던 나를 유연하고 전환이 빠른 사람으로 바라보려 합니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여러 가면을 돌려쓸 수 있는 나를 즐거이 계발하고 싶은 맘입니다.
11월 매일 글쓰기(개인적으로는 그림도 함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바라보건대, 그때그때 주제에 어울릴 드로잉 도구, 문체와 구성을 고민하면서 하나의 스타일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에너지를 '좀 더 재밌게 시도해보자'로 넘겼더니 정말 즐거웠습니다. 앞으로 대중없이 작업할 생각은 아니지만 조금 더 넓은 차원에서 동일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 안에서 유영할 수 있을까? 로 고민이 바뀌었습니다. 긍정적인 다중스러움을 위하여!
나를 찾는 여행 중,
내일은 스물일곱 번째 편지를 씁니다.
https://brunch.co.kr/@chograss/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