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는 고기나 생선을 푹 우려낸 시원한 국물을 '베지근하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잔칫날이면 돼지를 잡곤 했는데, 없는 살림이다 보니 푹 고아 여럿을 대접해야만 했었다. 등뼈만 모아서 푹 고으면 쩝짝뼈국, 남은 뼈와 고기를 모아 끓인 국물에 국수를 말면 고기국수, 그 국물에 고사리를 넣으면 고사리 해장국, 몸*을 넣으면 몸국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멸치, 각재기*, 갈치, 보말* 등 바다에서 나온 그 어떤 것을 넣고 끓이든 베지근하니 제주도에서는 세끼 혹은 네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게 된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고기국수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고기 국숫집으로 달려갔다. 돼지뼈와 고기를 푹 고아낸 국물에 중면을 만 뒤, 고기 수육을 두툼이 썰어 척척 내어 주신다. 뽀얀 국물을 호호 불어 후루룩 삼키면 비로소 제주도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온 몸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고기국수를 먹는 것은 나에게 신성한 의식과도 같아서 꼭 이 고기국수를 한 그릇을 비워야 제주도에 도착한 느낌이 난다.
*몸: 모자반을 부르는 제주도 말
*각재기: 전갱이를 부르는 제주도 말
*보말: 바다 고동을 부르는 제주도 말
2. 방어하면 모슬포, 모슬포하면 방어
방어회와 고등어회
방어는 찬 바람이 불어야 맛이 오르는데, 마라도 근처에서 잡은 방어를 으뜸으로 친다. 마라도 근처의 센 물살을 가르며 자리돔과 멸치 떼로 살을 찌운 통통한 방어들은 살이 단단하고 맛이 녹진한데, 특히 아주 큰 놈은 참치처럼 고소하면서 특유의 진한 맛이 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제주도 서남쪽 귀퉁이의 모슬포에는 대방어를 맛보려는 사람들로 더욱 북적인다.
이 날은 방어와 고등어를 모두 맛볼 수 있다 하여 흔쾌히 둘 다 주문했는데,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고등어도 기름이 자르르한 게 방어 못지않았다. 방어 한 점. 고등어 한 점. 소주 한 잔. 젓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다 보니 탕을 내어주셨다. 방어는 머리가 유독 커서 횟감이 크기에 비해 적게 나오는 편인데, 어두육미라고 했던가. 오히려 이 큰 머리를 큰 솥에 자작하게 조리면 푸짐하게 먹을 수 있어 좋기도 하다. 방어와 고등어 회를 치고 남은 부위를 섞어 메밀가루만 넣고 맑게 끓여 내어 주셨다. 제주는 메밀가루를 넣고 국물을끓이기도 하는데, 주인분이 토박이 신지 생선 맑은탕에 메밀가루를 넣으셨다. 처음에는 살짝 텁텁하기도 했는데, 몇 숟갈 먹으니 걸쭉하면서 고소해서 자꾸 생각나는 맛이었다.
3. 술 먹은 다음 날은 반드시 갈칫국
갈칫국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맛있었던 국물 요리는 갈칫국이었다. 바다에서 갓 잡아온 갈치를 끓이면 은빛 비늘이 조금씩 떠오르는데 노란 호박과 초록 배춧잎을 무심히 썰어 색깔을 더한 뒤 청양고추를 한 꼬집 넣어 매콤한 향을 더하면 완성이다. 알록달록한 겨울의 서귀포를 닮은 꽤 이쁜 국인데, 한 입 호로록 먹으면 어제 먹은 술이 쑤욱 내려가는 시원함에 놀랄 것이다.
사실 실제로 먹기 전에는 엄청나게 겁이 나는 메뉴였다. 복어나 대구같이 담백한 생선을 푹 끓여 미나리와 청양고추를 넣어 먹는 시원한 맛은 대충 상상이 가는데, 당최 은빛 비늘 가득한 비릿한 갈치를 생뚱맞게 늙은 호박까지 넣고 끓인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 맛이었다. 하지만 국물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어보니 바로 집 앞바다에서 싱싱하게 채낚기로 건져 올린 은빛 갈치를 받아 든 동네 아낙들은 이렇게 요리했을 법하다는 게 수긍이 갔다. 갈치의 비린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특유의 고소함과 포슬한 식감만 남아 뭉근한 늙은 호박과 자연스레 어울렸다. 식감이 재미없을 때쯤 아삭한 겨울 배추를 뭉텅뭉텅 씹어 삼키면 배춧잎 사이사이 녹아든 담백한 국물이 배추의 단맛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퍼졌다. 전 날 먹은 술은 이미 깨끗이 씻겨 내려가고 칼칼한 이 국물을 안주삼아 또다시 한 잔 더 걸치게 될까 재빨리 한 그릇을 뚝딱 먹고 일어나야 하는 집이다.
4. 형형색색 서귀포
서귀포 감귤밭
제주도의 남단 서귀포는 겨울이 더욱 아름답다.표선해변에서 서귀포 시청을 향해 달리면 양 옆으로 귤이 잔뜩 열린 초록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 까만 돌담 너머에 앙증맞은 초록 귤나무들 사이사이마다 쨍한 주황색 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제주도 파란 하늘과 어울리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작은 농장에 들어가 두 팔을 걷어 부쳤다. 한 바구니 가득 따다 차 뒤에 던져두고 여행 내내 까먹다 남겨진 귤은 집까지 따라왔다. 어찌나 싱싱한지 여행에서 돌아온 며칠간 향긋한 귤들이 다시 나를 제주도로 데려가 주었다.
동백수목원
주황빛 귤나무 사이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빨간 동백이 가득하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병풍처럼 둘러싼 야자수들도 눈에 들어오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면 키 작은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하다.
다음날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주황색 전구가 가득 달린 귤밭을 등지고 송악산으로 차를 몰았다. 저 멀리 산방산이 보이기 시작하자 파란 바다를 노란 갈대가 물들이는 해안가가 나타난다. 나도 모르게 차를 세우고 한참 부서지는 파도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크게 숨을 쉬니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고,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들이 사각사각 귀를 채운다. 멀리 보이는 작은 섬들에 눈이 닿았을 때, 그 앞을 가로지르며 마라도로 달려가는 여객선이 눈에 들어온다. 그 여객선 뒤로 일어난 하얀 포말이 심심한 파란 바다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다시 크게 숨을 내쉬니 하얀 입김이 아름다운 풍경 사이로 서서히 퍼져나간다. 이렇게 천천히 숨을 마셨다 뱉었다 하며, 가만히 서서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추운 공기에 뺨이 따가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빨강, 주황, 노랑, 파랑, 하양. 겨울의 서귀포는 유난히 형형색색 다채롭다.
송악산에서 바라본 산방산
4. 마무리
마지막 날, 공항으로 차를 몰 때면, 꼭 바닷가에 들러 한 참을 바라보곤 한다. 뭍의 바다와는 때깔도 다른 이곳 바다를 또 언제 다시 만날지 아쉬워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다 보면 공항에서 항상 서두르게 되곤 한다. 옛날 제주 사람들은 귤나무가 말라죽으면 좋아했단다. 열매도 맺지 않은 꽃을 몇 개인지 세어다가 그 숫자 그대로 공물로 귤을 거두곤 해서차라리 귤나무가 말라죽어버렸으면 했단다. 쌀농사도 어려워 메밀로 주린 배를 대충 때우기 일수였고, 해녀들은 차가운 바다에서 목숨 걸고 물질해서 전복 공납을 맞춰야만 했다. 오죽하면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는 말을 했을까.
그런 슬픈 역사를 뒤로하고 지금의 제주도는 나에게 한없이 평온한 천국이다.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는 항상 연착으로 한두 시간쯤 늦게 도착하기 마련인데, 고기국수를 호로록 먹고 나면 이상하게 짜증이 국물과 함께 쓰윽 내려가곤 한다. 바다를 따라 차를 몰면 나를 짓누르던 고민도 걱정도 강한 바람에 씻겨 날아가버리곤 한다. 제주도는 그런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늦은 오후에 제주도에서 주문한 천혜향이 도착했다. 상자를 열자 집안 가득 향이 은은하게 퍼져서 기분이 상큼해진다. 조금 있으니 천혜향을 받았다는 문자들이 속속 도착한다. 내 마음의 천국에서 보내온 선물들로 그들도 상큼한 행복을 맛볼 수 있기를.
5. 추천코스
협재 해수욕장
먹는 걸 좋아한다면: 모슬포항에 숙소를 잡고 근처 송악산과 곶자왈을 둘러보기
눈이 왔다면: 한라산이나 비자림에서 설경 감상하기
겨울 제주도 일정 세울 때 몇 가지 팁:
- 제주도를 하나로 생각하지 말고, 숙소를 한 번 정도 옮기는 것이 시간을 아낄 수 있다.
- 제주시보다는 서귀포시에 머무는 것을 추천한다. 날씨가 좀 더 온화하고 귤 밭도 더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