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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렇게 애쓰지 말아요

허지원의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by 보름달


인생은 <모 아니면 도>가 나오는 윷놀이는 아니지만 걸이라도 나왔으면 그래, 아쉬운 대로 개라도 나오기를 간절히 외치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을 공부한 허지원작가의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는 언제 생을 마쳐도 이상하지 않을 각자의 궤적을 삽니다.
매일을 쾌락적으로 살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내게 관대해져도 좋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전전긍긍하며 살지 마세요.
짓눌리는 감정으로 새벽에 눈을 떠 치받히는 불안에서 주위를 분산시키려
무의미하고 피상적인 인터넷 서핑에 몇 시간씩을 소모하는 일상들이
사실은 당신을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이렇게까지 애쓰지 맙시다.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노력을 합시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마는 겁니다.
저 스스로도 언젠가부터 주문처럼 외우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치료 장면에서 가장 효과적인 표현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P. 114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한 명 있다. 명문대를 졸업해서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될 대로 돼라 식으로 생각해. 아니면 말고”

아니면 말고라니. 내 친구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줄곧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될 놈 될?이라는 요즘 속담에 맞아 들어가는 걸까? 인생은 이상하게 흐르고, 계획은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인데 <안되면 말고> 정신으로 성취한 전리품들을 보면 신기하다. 그게 되는 거였구나. 아니면 말고가…


나는 그런 태연함이 부럽다. <안되면 되게 하라>, <될 때까지 해라> 이런 말만 듣다가 <안되면 말고>라니

그런 나약한 생각을 하면 나약한 결과만 복사한 듯 출력되지 않을까? 적당히 게으른 나를 채찍질했던 무기가 불안함이 아니었을까?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매번 완주도 못하는 조바심난 마음이 부정출발한다. 아직 아니라고! 앞서나간 마음을 타이르며 다시 출발 선으로 데리고 온다. 정말 필요한 건 조바심이 아니라 휘슬이 울리면 반사적으로 뛰쳐나가는 실행력일텐데


유퀴즈에는 1년 만에 사시를 패스한 능력자와 28년 만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가장의 이야기가 나란히 나왔다. 28년 만에 합격하고 그가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라 했다. 같은 목표를 가졌다고 똑같은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역량, 운, 환경은 목적지만 같고 완전히 다른 여정을 만들어낸다.


태연한 자세로 단기간에 성취한 타인의 결과물은 그저 동경의 대상이다. 그런 사람 앞에 있으면 안간힘으로 쥐어짜 내듯 얻어낸 작고 초라한 내 것이 민망해진다. 인생은 실패하면 그래서 실패한 스토리가 되고, 성공하면 그래서 성공한 스토리로 쓰인다. 과정은 때론 결괏값을 먼저 확인하고, 수정되고 미화되곤 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진실 위에 만들어졌다는 데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패할 것이며, 느닷없는 불행과 거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매일 조금씩의 허무를 이기고 그럭저럭 잘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100% 완벽해질 필요도 없고 뭔가를 성취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성과들이 나의 존엄성과 가치에 큰 의미가 있긴 할까요?
살아온 그 수십만의 시간 동안 우리는 언제나 완벽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0도, 0.5도 아닌 1로서 계속해서 존재해 왔습니다.

괜찮아요 충분해요.
이렇게까지 애쓰지 맙시다. p.116-117


우리는 이미 완벽하다. 어중간한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완전체

그러나 존재 자체의 완벽함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다. 삶이 성공과 실패의 결괏값이 아니라 초연함을 배우는 과정이길 바란다.

잠시 힘을 빼고 유영하듯 이 여정 자체를 즐겼으면 좋겠다. 다정한 당신과 함께 이 시간을 타고 흐르며, 이번 지구별 여행도 안녕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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