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하하하 프렌즈의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
‘푸하하하 프렌즈’는 하이브와 디스이즈네버댓 사옥을 설계한 꽤 유명한 건축회사다. 이 회사의 사명이자 책 제목인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는 직원들이 페이스북에 사명 후보를 올리고 투표로 최종 선택한 에피소드까지 더해져 흥미롭게 느껴진다. 특히 작가가 겪는 우울감에 대한 글은 인상적이었다.
내 우울이 거절당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요. 저는 말이죠’ 나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대화는 보통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설명과 설명이 덧붙여진 아주 복합한 이름이 나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어줬다면 나는 이곳에 앉아 진료순서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겠지.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나를 이해시키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듬으면 다듬을 수록 점점 작아지는 몽당연필처럼 가다듬으려 하면 할수록 알맹이는 점점 작아지고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공산이 크다. p.182
우울이라는 것을 입에 담기에 머뭇거렸던 건 어디에서도 우울이 거부당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울을 선택하고 우울을 고백하게 되면 누군가 보듬어 줄테고 그러다 보면 마음의 벽이 허물어져 엉엉 울어버릴까 걱정했지. 내 우울이 거부당할 일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곧바로 나는 환자의 역할에서 깨어났고 나도 모르게 웃었다. 거부당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192
나는 우울을 선택해도 입에 담지 않으려 한다. 우울을 고백받으면, 상대는 출구 없는 지뢰게임에 갇힌다. 안전지대와 지뢰가 숨겨진 곳을 방황하며 내 어두운 마음속을 헤매야 한다.
마치 해체 방법을 모르는 사제폭탄을 건네받은 것처럼, 상대는 눈치를 살피며 스무고개를 시작할 것이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그래도 괜찮아질 거야” 등 나조차 모르는 답을 찾기 위해 너는 스무 번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질문을 이어가야 한다. 그렇게 너는 술래가 되서 나를 쫓아오고 그럼, 나는 본능적으로 숨거나 도망가겠지.
벽지는 언제부터 미워지기 시작했을까? 들뜬 벽지만큼 신경 쓰이는 것도 없다. 오래된 음식점의 들뜬 벽지를 쿡쿡 눌러보면, 그 사이에 들어간 공기 방울들이 기분 나쁘게 울컥 인다.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공기만 차 있을 수도 습기가 차 있을 수도 벌레들이 가득할 수도 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작은 공간들이 모든 벽에 둘러쳐져 있으니 우리에게 느껴지는 작은 불안함의 출처로 의심되기도 한다. 내 팔뚝에 닿는 것이 이 건물의 몸이 아닌 다른이 세계라니. 내가 들뜬 벽지에서 느끼는 불쾌감은 그 모를 세계에 기인하고 있다. 들뜬 장판은 더하다. 벽지는 닿지 않을 수라도 있다면 바닥에 넓게 깔린 장판은 피할도리가 없다. 바닥은 더 큰 불쾌를 품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불록 튀어나온 부분들을 피해 가며 발을 딛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p114
건축사무소에 근무하는 작가가 리모델링을 위해 방문한 장소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벽지와 장판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벌어진 틈 사이에는 공기만 들어있을 수도, 벌레가 가득할 수도,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을 들어있을 수도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생긴 틈은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일상 속에서 계속 마주하는 벽지 사이. 계획에서 저만치 멀어진 불편한 틈이 흔들리는 치아처럼 혓바닥에 치인다. 닿지 않는 공간, 피하고 싶은 공간은 죽은 영역이다. 없음보다 있음이 더 신경 쓰이는 곳. 인생에도 이렇게 계획에 없던 틈이 생긴다.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서 생기는 불편함.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묻어둔 기억과 과정들. 그곳에선 내가 모르는 세상과 세계가 자란다.
희망은 불현듯 발견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들여 발명되기도 한다 p. 193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 과정 속에서 달아나고, 도망쳐온 자리로 다시 회귀한다. 불편해서 들여다보지 못한 벽지 사이 틈에는 고백하기 전, 거절당할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우연히 발견되기도 하지만 때로 공들여 발명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