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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판적일상 Oct 16. 2019

내 이십대를 함께해 준 설리와 이별하며

왜 나는 너와 아는 사이도 아닌데, 너와의 이별이 이렇게 아플까


푸릇푸릇했던 대학생 때, 나는 그의 새빨간 단발머리 사진을 보고 반해 미용실에 가 난생처음으로 빨간색 단발머리를 해본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와 완전히 똑같은 머리를 가질 수는 없었지만.


그가 속해있던 그룹의 노래를 내 미니홈피의 배경음악으로 설정해두고, 미디어 속 그의 모습을 찾아보며 맘속으로 혼자 그를 좋아하기도 했었다.


이후 언젠가는 그의 행보를 보며 파격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놀라기도 했었다. 그리고 최근 소신있는 목소리를 당당히, 멈추지 않고 이어가는 그를 보며 참 멋진 사람이라고 마음으로 응원해오기도 했다. 어느 독서토론의 자리에선 그가 방송에서 했던 이야기 중 감명을 깊게 받았던 얘기와 행보를 인용하기도 했었다.





그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내 이십대의 일생에 있어 크든 작든, 내게 깨알만큼이라도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으며 나는 그를 참 좋아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한 번도 직접적으로 그 얘기를 닿게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마음으로나마 응원하면 응원의 마음이 닿을 줄 알았다.


선정적인 문구가 늘 그의 이름 앞에 수식어로 붙어있는 기사의 헤드라인들을 무수히 마주할 때마다 불쾌해했으면서도 항의댓글 한 번을 달지 않았다. 관심을 주지 않는 것으로 소극적 불쾌감을 표했을 뿐이었다. 자극적인 말들로 그에게 성희롱의 말들이 담긴 악플, 인신공격의 내용이 담긴 악플들을 남기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자제를 요구하지 않고 '싫어요'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별 영향력없는 소극적 저항을 했을 뿐이다.


결국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방관자가 되버리는 것일 뿐, 힘을 보태주는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스스로 글도 썼으면서.


그래놓고 나는 그의 곁에서 방관자로 남았다.





그가 막 앳된 얼굴로 가수로 데뷔를 했던 때 사람들은 그의 몸매를 도마 위에 올려 별명을 짓고, 난도질을 했었던 걸 기억한다.(미디어에 비친 그는 나보다 훨씬 날씬하고 예뻐 보였는데, 그런 그도 비난을 받는 걸 보며 나를 검열하기도 했었던 기억으로 인해) 고작 십대의 아이였는데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바싹 마른 몸으로 컴백했을 때, 이번에는 각종 수술, 시술에 대한 악플로 그는 평가되고 비난받아야만 했다.


표정이 좋지않고 춤 동작이 작으면 그의 성격과 태도에 대해 비난이 가해졌다.


열애설이 터졌을 때, 노출이 있는 옷을 입었을 때, 노브라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성적 모욕을 주며 생채기를 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저 너머의 것까지 추측해서 평가하고, 비난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과, 입는 옷, 만나는 사람,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나노 단위로 평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평가와 비난의 지점을 모두 따라가보면 결국 한국사회 속에서, 가장 물어뜯기 손 쉬운 자리에 있는 '여자' 아이돌이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정도만 다를 뿐 외모, 몸매에 대한 원색적인 뒷 얘기,평가, 순위 매기기, 비난, 행실에 대한 평가, 연애에 뒤따르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언사들... 이러한 종류의 모든 평가와 비난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경험한 바가 있기에 그가 견뎌낸 괴로움과 고통의 시간들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나조차도 그를 보며 '예쁘다'는 등 감히 마음 속으로 평가내린 적이 있었으니까.


그는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의 아픔을 겪고 있던 순간에도 '예쁘다는 칭찬의 말도 결국 평가가 될 수 있다. 상대를 평가하지 말자'고 용기내어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무색하게 또 다른 이들이 평가되고, 비난받고, 그 모든 것을 감내하라 암묵적으로 강요받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결국 또다시 그저 고개를 돌리고, 소극적 불쾌감을 표한다면 나는 또 언제든 소중한 누군가를 잃게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옆에서 방관자로밖에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점점 더 어린 여자아이들이 엔터산업을 위해 오로지 '상품'으로 키워지고 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매스컴의 파급력이 이러한 상품화와 대상화를 미디어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로 그치지 두지 않을 것이다.(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러니 분명 '사람'인 이들을 철저히 '상품'으로서,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우리의 세태부터 바꾸어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과정에서 더 이상은 방관자로만 남지않으리라.






그에게 이 생에서 수고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어떤 다짐의 눈빛을 보내며, 그의 노래 '고블린'의 뮤직비디오에서 나왔던 나레이션을 곱씹어본다.



저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녀는 그냥 인사만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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