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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판적일상 Nov 14. 2018

'과로'를 법으로 보장하는 사회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의 모순을 바라보며

이번 정부가 들어선 후, 내게 가장 반갑게 다가온 한 문장이 있다면 바로 '저녁이 있는 삶'이다.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평일 저녁 시간을 온전히 누려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늦은 퇴근을 하고 나면 허기를 채우고, 씻고, 다시 다음 날의 출근을 위해 잠을 청하는 것으로 저녁 시간을 소모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내가 일하던 구로의 빽빽한 건물들은 밤이면 늘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촬영장 막내 스태프인 내 친구는 현장에서 쪽잠을 자는 날이 빈번했다. 재작년, 건너 건너 아는 한 신입기자가 과로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5일, 여야정 협의체에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에 합의했다. '저녁이 있는 삶'을 강조하던 정부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진행한다니, 모순적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주 40시간 노동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장근로는 최대 12시간까지로, 한 주에 최대 총 52시간 노동이 가능하다(주 52시간 근무제는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300인 이상의 사업장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먼저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근로기준법 51조에는 '탄력근로제'를 규정하고 있다. 석 달 동안 평균을 내 한 주에 총 52시간의 노동시간만 넘기지 않는다면, 고용주가 특정 주에는 더 집중적으로 일을 시킬 수 있는 제도다.


3개월 단위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는 경우로 예를 들면, 한 주 최대 64시간 일을 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위 기간이 6개월, 1년으로 확대되면 될수록 노동 시간은 더욱 길어진다. 휴일 없이 매일 일을 시킬 수도 있다. 하루에 일을 시킬 수 있는 최대 시간에도 제한이 없으며, 최소 연속 휴게시간 규정 역시 없다.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및 근골격계 질병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에 따르면,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을 초과하는 경우 업무와 발병과의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만성과로로 인한 산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탄력근로제를 확대하게 되면 노동자에게 12주 연속으로 60시간 이상 일을 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며 노동자는 합법적인 과로사의 위협에 내몰리게 된다.


게다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는 현재의 과로사 산재 기준까지도 퇴보하게 만들 위험성을 가진다. 법이 노동 시간을 늘리도록 허용한다면, 과로사 산재의 기준이 퇴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단순한 우려라기에는 충분히 가능성이 높게 느껴진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한 주 40시간을 초과하는 근로시간에 대해서는 통상임금의 150%인 연장근로수당이 지급된다. 그러나 탄력근로제 하에서는 주 52시간까지는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한주에 12시간의 연장근로수당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그만큼 연장근로수당을 받지 못하는 날이 많아져 노동자들의 경제적 타격 또한 커지게 된다.


결국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이 과로사의 위협과, 더욱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노조가 없는 중소영세업체의 노동자들,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장시간 노동에 방치돼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악화될 상황에 처한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단순히 민주노총의 기득권 지키기로만 여기는 문제의식 또한 아쉽다.






나는 지금의 사태를 바라보며, 몇 시간 야외에 서 있기도 힘들었던 여름의 폭염 속에서 한 주에 64시간 이상을 일하게 될 지도 모를 에어컨수리기사님들, 야외 현장의 노동자들의 힘든 얼굴을 떠올린다. 정말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탄력근로시간제 확대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먼저 이를 원하는 국회의원들부터 스스로 탄력근로제를 적용해 초과수당 없이 연장근로를 시행해보길 권하고 싶다. 물론 그들의 업무 환경으로는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온전히 체감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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