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책으로 할 수 있는 일들
몇년 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난 인연이 하나 있다. 내가 출판사에서 나와 프리랜서가 된 3년 전부터 지금까지 함께 일해온 와이스토리라는 회사이다. 이곳은 출판사가 거의 대부분인 나의 거래처들 중에 유일한 교육 콘텐츠 회사이다. 와이스토리 윤성혜 대표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면서 오직 책을 팔아보겠다는 일념으로 강사들을 알음알음 모아 도서관이나 학교로 강의를 만들었던 경험이 전부인 나를 교육 콘텐츠 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한 장본이기도 하다.
와이스토리는 개인의 이야기를 찾도록 도와주면서 이것이 한층 완성도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이론과 개념을 만들고 교육하는 곳이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믿음으로, 2년 넘게 연구해서 만든 것이 ‘이야기톡’이라는 스토리텔링 그림카드인데, 이 카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나는 지금도 와이스토리와 함께 일하면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탄하며 눈물짓고 때로 웃으면서 이야기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많이 가진 사람이든 적게 가진 사람이든, 많이 배웠든 그렇지 않든, 많이 읽었든 적게 읽었든, 그리고 나이와 직업을 떠나 이야기 앞에서는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평등할 수 있다는 점도 엄청난 매력이다. 그렇게 윤 대표와 여러 선생님들께 배운 이야기 철학은 이 세상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함부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이제 나의 삶의 목표가 되어가는 중이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결국 그가 가진 이야기를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는 뜻 아닐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방문객> 중에서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스토리콥스(StoryCorps)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보존하고 공유하는 미국의 비영리 단체이다. 이 회사의 대표인 데이브 이세이라는 사람 역시 와이스토리 윤 대표처럼 이야기를 모으는 사람이다. 미국 시내 한복판에 이야기부스를 만들어놓고 누구든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고, 이를 모두 녹음하여 화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게 되었을까?
데이브는 오래 전에 노동자 숙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그들의 숙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어둡고 작은 방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촬영한 얼마 뒤, 그는 그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썼다. 처음 나온 따끈따끈한 초판본을 들고 그들을 찾아간 날, 한 사람이 그 책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데이브 손에서 빼앗아 복도를 가로질러 달리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살아 있어! 나는 존재한다고.”
이 한 마디가 데비브를 이야기 모으는 사람으로 만든 것 같다.
몇년 전부터 출판계는 에세이 분야가 아주 인기다. 지금은 너무 많이 출간되어 어지간해서 독자들의 눈에 들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작년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에세이가 3권이나 포함되었을 만큼 그 열풍은 여전하다. 소설가나 시인들,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쓰는 에세이도 인기지만, 특별한 경험을 한 보통 사람들이 쓴 수기에 가까운 에세이집도 독자들의 남다른 애정 속에서 판매가 꾸준한 책들이 꽤 많다.
전문가들 중에는 최근 3-4년간 지속되는 에세이 열풍에 대해 사회나 우리보다 ‘나’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그렇다는 이도 있고, 책이 지식과 정보 제공이라는 과거의 제 역할에서 완전히 벗어나 점점 위로와 힐링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에서는 에세이가 대량 출간되는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람들의 신변잡기적인 스토리가 책으로 묶이는 게 거북하다는 반응이다.
나는 에세이라는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장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책을 엄숙하고 고결하게 생각하는 쪽은 아니고, 그저 취향이다. 지금도 즐겨 읽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책들이 아주 많다. 나의 이런 독서 취미를 떠나서, 나는 에세이가 많이 출간되는 데에는 찬성(?)이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 어디에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중히 다뤄질 무대는 별로 없다. 자기표현의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는 자기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에 귀를 더 많이 기울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가정에서는 부모님과 자녀의, 회사에서는 상사와 후배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 모범생, 효자, 좋은 부모, 개념 있는 직장인이 된다.
앞에서 말한 와이스토리와 스토리콥스가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한 것도 현대인들이 관계 속에서 소외된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에게 집중하다가, 결국 자신 자신을 찾지 못해 좌절하고 방황하는 모습에서 그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닐까?
에세이 출판이 이 글의 본질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 방식이나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나와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는 경험을 자주 해보아야 개인과 그 사회가 건강해진다. 건강한 사회는 80대 노인의 이야기부터 6-7살 아이의 이야기까지를 모두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를 자유롭게 노출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는 사회이다. 그것을 들어주고 기록하고, 후대에 남기는 일도 사회가 해야 할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람들이 에세이를 쓰는 것이 좋고, 책으로 묶이는 일도 대환영이다!
“나는 살아 있어! 나는 존재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