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장구채를 처음 잡았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었다. 내가 배운 가락은 전라도의 동쪽 지역인 남원, 임실, 순창 등지에서 발달한 호남 좌도 농악, 그중에서도 임실 지역에서 전승된 필봉농악이다. 여럿이 악기를 치며 노는 단체 놀음이 특징인 필봉농악은 마을굿의 원형을 잘 보존했고, 이를 위해 전문가를 길러내는 한편 전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방학 때마다 일반 강좌도 열었다. 나는 장구를 배우기 위해 동아리 사람들과 방학 때마다 그곳 풍물 학교로 들어갔다. 초등학교 폐교를 수리해서 만든 이 학교는 작은 슈퍼 하나 없는 전라도 남원 산골짜기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밥만 먹고 악기만 치다 왔다. 그게 얼마나 고단했는지 일주일 뒤에 집에 돌아오면 이틀은 내리 잠을 잤을 정도였다. 지금은 그 허름한 폐교를 떠나 본고장인 임실로 거처를 옮겨 필봉문화촌이라는 복합 공간에서 전승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풍물 강좌를 들으러 가면 식당에서 밥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라떼는’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우리는 폐교 바닥에서 밥을 손수 지어 먹었기 때문이다. 하긴 내가 머문 곳은 폐교이긴 해도 비와 눈을 피할 수 있고 방바닥도 따뜻했는데, 나보다 10년 앞서간 선배들은 비닐하우스에서 지내며 악기를 배웠다니 ‘라떼’ 이기는 ‘라떼’는 늘 무궁무진하다. 어쨌거나 내가 말하고 싶은 라떼는 폐교 교실에서 지어 먹은 밥 이야기이다.
우리 동아리는 방학 때마다 열리는 풍물 학교에 가기 위해 푼돈을 거둬 강습비를 내고, 나머지로 식재료와 각종 양념을 샀다. 버너, 냄비, 프라이팬, 그릇, 수저, 하다못해 수세미도 챙겨야 했다. 그야말로 피란 살림이 따로 없었다. 전국에서 모인 각 대학교 동아리들이 싸온 짐을 보면 가관이 아니었다. 선풍기와 밥솥까지 들고 오는 학교도 있었다.
하루하루 생활하는 모습도 피란민들 같았다. 우리는 방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임시 부엌을 차려놓고 그곳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소꿉장난 같은 그 낯선 단칸방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동기들도 많았다. 그러나 딱 이틀만 지나면 모두 그곳 분위기에 맞게 조금씩 후줄근해졌다. 집에서 밥 한 번 해본 적 없다고 구시렁거리던 동기들도 식사 당번이 되면 어떻게든 밥상을 차려냈다. 여러 번 와본 선배에게 굽실거려 도움을 받든, 옆 학교에 가서 부족한 재료를 빌려오는 한이 있어도 발을 동동거리며 식사 준비를 해냈다.
음식 잘하는 사람이 당번인 날은 제대로 된 밥을 먹었지만, 대개 늘 뭔가 빠지거나 더 넣은 맛, 덜 익거나 너무 많이 익은 음식을 먹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국과 반찬은 다반사였다. 감자가 익지 않은 카레, 미역 맛보다 마늘 향이 더 진한 미역국, 냉장고에 넣지 못해 시어빠진 김치는 그나마 괜찮았다. 밥이 설익지만 않으면 우리는 행복했다.
재미있는 것은 신문지 깔고 밥 먹는 곳에 끼니때마다 손님이 찾아온다는 점이었다. 주로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들이나 반죽 좋은 타 학교 학생들이었다.(타 학교 남학생들이 우리 방에 오는 이유는 우리 방에서 한 음식이 꼭 먹어 싶어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여학생을 향한 흑심일 때도 많았다.)
“오늘 여기 메뉴 좋다고 해서 왔지.”
“오늘 뭐 맛있는 거 했는가~~~?”
전라도에서 온 어떤 남학생은 걸쭉하게 노래를 부르며 방에 들어와 우리를 까르르 웃게 했다. 우리는 손님이 놀러 오면 그를 가장 좋은 자리에 앉히고 얼른 수저를 놓고 밥 한 그릇을 떠 주었다. 수줍은 목소리로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라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더 맛있는 게 없는지 찾아 내놓기도 하는 등 손님 대접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렇게 소꿉장난과 피란의 중간쯤에서 제법 어른 흉내를 내가며 일주일을 살았다.
집에 온 손님에게 밥을 주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다른 학교 방문을 홱 열고 당당히 들어와 밥과 술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애들이 부러웠다.
‘어쩌면 저렇게 반죽이 좋을까?’
나도 넉살 좋게 이웃집에 놀러 다니고 싶었다. 밥도 얻어먹고 서글서글 악기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전국 각지, 멀리서 온 애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성격이 소심해서 타 학교 학생이 꼭 오라고 여러 번 초대해야 못 이기는 척 가서 조용히 밥을 먹는 정도였다. 생면부지 사람이 지어주는 밥을 먹는 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싶다. 그 뒤로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을 먹을 생각 같은 것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럴 데도 없었다. 누구한테 그럴 수 있었겠나.
그런데 20여 년 만에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를 큰엄마라 부르는 여자 조카가 할머니 집에 놀러 왔다가 담 하나를 두고 이웃하는 이장님네 놀러 갔다. 때마침 밥때였다.
“저 밥 좀 주세요. 배고파요.”
조카는 넉살 좋게 밥을 달라고 했다. 그 집 아주머니가 있는 반찬을 꺼내 밥을 차리는데 고 귀여운 손님이 또 말했다.
“아줌마, 저 빨간 김치 못 먹는데. 할머니 집 가서 가져올까요?”
나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다닥다닥 붙어 있던 전수관의 작은 방들과 옆방 사람들을 생각했다. 악기 못 친다고 망신당해 옷이 다 젖을 때까지 연습하고, 밤마다 막걸리 마시고 악을 쓰며 민요를 부르다가 새벽이면 졸린 눈을 비비고 소고춤을 추러 나가던 곳. 그러나 그곳에서 내가 배운 것은 가락도 민요도 진풀이(치배들이 악기를 치며 짜는 대열)도 아니었다. 밥을 지어 나눠 먹는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아무 데서나 엉덩이를 비비고 앉을 줄 아는 반죽을 그곳에서 조금이나마 배웠다.
조카 덕분이었다. 어린 시절 나의 옹색했던 임시 부엌과 그 이웃들을 잠시 생각한 것은. 다음번에는 넉살과 당당함을 두루 갖춘 그 아이의 뒤를 따라가 보려 한다.
“○○야, 큰엄마도 데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