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부엌은 가게에 딸린 방 안쪽 작다 못해 옹색한, 부엌이다 할 만한 게 연탄아궁이뿐인 그런 곳이었다. 가게에 딸린 살림집이다 보니 얼기설기 급조해서 만든 티가 역력 했다. 단칸방에서 두 계단 내려가는 구조에다, 주인집의 마당으로 연결되는 쪽문까지 나 있어서 집 안에 있는 부엌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한 평 조금 넘는 부엌에서 음식도 만들고, 빨래도 하고, 놀러 온 동네 아주머니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 네 식구는 그 뒤 10년 동 안 세 번의 이사를 했고 부엌의 모습은 날로 좋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파트로 입성해 엄마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은 부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스물여섯 살에 독립하면서 다시 옹색한 부엌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의 첫 부엌은 고시원에 있는 공동 부엌이었다. 일 년 반 동안 세 군데의 고시원을 옮겨 다녔는데, 가격대에 따라 위생 상태가 조금씩 다를 뿐 공동 밥솥, 공동 냉장고, 공동 식탁 등 모든 것이 ‘공동’이었다. 그러나 고시원은 이름만 공동이 지 철저히 개인적인 곳이었다.
고시원의 냉장고 안에는 견출지에 쓴 이름이 붙어 있는 반찬통이 가득했다. 반찬이나 국이 담긴 통에는 이름만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반찬이 자꾸 없어지는데 조심해달라는 호소문부터 누군지 다 알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협박문이 붙기도 했다. 좁은 복도에서 어쩌다 만나면 서로의 몸이 닿지 않으려 애쓰며 지나갔고, 누군가 다른 이의 빨래를 가져간 날이면 어김없이 호소문이 붙었다. 고시원은 말보다 글로 소통하는 곳, 그래서 그런지 그 곳은 늘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건 평화로운 고요함은 아니었다. 조용하다 싶으면 크고 작은 싸움이 불쑥불쑥 일어났고 낯을 붉히는 일도 심심찮게 생겼다.
그나마 부엌은 다른 곳에 비해 생기를 띠었지만 어둡고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공동 식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게 싫어서 가능하면 냄새가 나지 않는 음식을 사다가 방에서 혼자 먹었다. 내가 그때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김밥이었다. 나는 부모로부터 독립한 자유에 익숙해질 때쯤 침대에 걸터앉아 김밥을 먹는 게 지겨워졌다. 처음에는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고시원 생활은 점점 고달파졌고, 그때부터 그곳을 탈출하는 것을 인생 최대 과제로 삼았다.
일 년 반 뒤, 드디어 월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학교 앞에 있는 5평 남짓한 집이었는데 나는 그 집으로 이사하는 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고시원에 살다가 월셋집으로 이사했을 때 무엇이 가장 좋을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화장실도 혼자, 부엌도 혼자, 냉장고도 혼자 쓸 수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공동’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날이 갈수록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부엌이었다.
그 집의 부엌은 싱크대만 있을 뿐 진짜 부엌이 아니었다. 불을 제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룸이 너무 작아서 가스레인지를 설치하는 게 불법이었다. 주인집에서 놓아준 인덕션은 원룸에 사는 젊은이들이 음식을 해 먹지 않을 거라는 전제로 놓아둔 물건 같았다. 계란프라이 하나 부치기도 힘든 고물 인덕션이라니! 찌개나 국은커녕 간단한 조리조차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반만 열리는 창문 때문에 음식 냄새가 잘 빠지지 않았다. 나는 그 집에 살면서 요리할 엄두를 내지 않았고 전기밥솥에 밥만 해서 간단하게 먹었다. 고시원보다 조금 나은 식사였다. 그런 날이 계속되자 나는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부엌에 창문도 있고, 가스레인지도 있는 집에 살고 싶다. ”
6년 뒤, 나는 소원대로 부엌에 창문과 가스레인지가 있는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 갖고 있던 돈에 맞는 집을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창문 달린 부엌을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방법은 있었다. 창문 달린 부엌으로 가기 위해 다른 것들은 포기하는 것이 었다. 나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30분 가까이 걸린다는 점, 너무 후미진 곳이라 밤에 위험할 수 있다는 점, 집의 반 이상이 사각형이 아닌 대각선으로 잘려진 구조라는 점, 너무 오래된 집이라 치워도 깨끗해지지 않을 것 같은 더러움 등 을 과감히 받아들였다. 그보다는 창문 있는 부엌이 더 좋았다.
나는 그 집에서 드디어 요리를 시작했다. 고시원과 월셋집에 서 터득한 간편식부터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음식까지 부지런히 해 먹었다. 사람들을 초대해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는데, 그때 내 음식을 먹은 한 지인은 지금까지 내가 해준 연포탕이 맛있었다고 말하곤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재래시장에 가서 싱싱한 재료를 사는 것을 낙으로 살았으니 그동안 부엌 없이 산 설움을 요리에 전부 쏟아부었던 것 같다. 그러나 5년쯤 지나면 서 나는 또 그 부엌이, 아니 그 집이 싫어졌다. 또 뭔가가 거슬리 기 시작했다.
오래된 창문틀이 전부 비틀어져 창문을 잠글 수 없고, 한여름에는 커다란 얼음을 안고 누워도 더위에 잠을 이룰 수가 없을 정도로 바람이 통하지 않는 집이었다. 어렵게 사들인 중고 가구와 중고 가전제품은 하나둘 삐걱거렸고, 치워도 치워도 빛이 나지 않은 집 곳곳이 꼴도 보기 싫었다. 어느새 그 집이 고시원처럼 보였다. 그때쯤 나는 결혼을 했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신혼집을 처음 보았을 때 몹시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은 고시원으로 독립했을 때, 고시원에서 월셋집으로 이사했을 때, 월셋집에서 전셋집으로 옮겼을 때보다 줄어든 기쁨이었다. 그러나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 정도면 감사하지. ’
‘그래도 본 집 중에 제일 낫잖아. ’
‘빛도 잘 들어오고 부엌 창문도 이렇게 큰데. ”
그러나 나는 지금 더 나은 부엌을 꿈꾼다. 고시원보다 독립적이며, 월셋집보다 넓고, 전셋집보다 깨끗한 이 집에서 더 좋은 부엌을 상상한다. 지금의 부엌이 싫은 이유를 10가지 넘게 댈 수 있다. 욕망은 이전 것들이 이유 없이 싫어지는 마음으로 시작된다. 내가 꿈꾸는 부엌들은 끝이 있을까? 부엌에 관한 나의 마음은 끝이 없고 그것 때문에 이전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음은 자명하다.
다만 한 가지 희망은 세월의 흐름을 따라 끝까지 바라고 바라도 괜찮은 것이 하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집밥이다. 그 옛날 고시원을 탈출할 목적이 집밥이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가스레인지 없는 월셋집에서도 꾸역꾸역 지어 먹은 따뜻한 밥이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 했던 고달픈 시절을 버티게 했고, 재개발을 앞둔 초라한 전셋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여 차린 밥상은 나의 숨은 자랑이었다. 밤늦게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밥을 짓는 나 와 새벽에 아침을 먹는 나를 위해 밥을 짓는 남편이 사는 지금 집에는 밥 냄새가 끊이질 않는다. 우리는 그 냄새를 맡으며 한 식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온순한 욕망인 집밥에 대한 갈망은 멈추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좋은 부엌을 가질 때마다 느끼는 행복은 이제 줄어들게 내버려 두고서.
그렇다면 안녕, 지난 날 꿈꾸던 나의 부엌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