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ords Divin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cribe Dec 29. 2022

Who Are We?

Part 1.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군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아마 인간이 던진 가장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고대 철학자부터 천체 물리학자까지 우린 아직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이에 따른 수많은 세계관과 철학들이 만들어져 왔다.


인간을 바라보는 철학과 세계관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오죽하면 영어권에서는 "The Human Condition" 인간됨을 마치 일종의 희귀 질병과 유사한 개념으로 설명하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고대 로마 시인인 오비디우스(Ovid)는 인간은 거인들의 피가 땅 속으로 스며들어 탄생했다고 전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인간은 신과 거인보다는 열등하고 신들의 기분에 따라 영광을 받거나 모든 걸 빼앗길 수밖에 없는 가여운 존재이다. 고대 바벨론의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시("Emuna Elis")에 의하면 인간은 신들의 전쟁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다. 계몽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현대 과학 중심의 세계관에서는 호모 사피엔스는 수백만 년간의 경쟁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은 인류의 한 부류일 뿐이다.


히브리 성서의 세계관도 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히브리 성서 전체의 도입부 역할을 하는 "창세기"의 원제목은 히브리어로 "처음"(בְּרֵאשִׁית)을 의미하는데 말 그대로 온 우주와 인류 탄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구절들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6-

야훼의 6일간 이어진 천지 창조 내러티브에서 가장 마지막 날에 인간을 만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벌써부터 바벨론과 같은 고대 근동 문화권과도 대조적인 걸 알 수 있다. 이 짧은 한 구절에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인간을 어떠한 존재로 바라봤는지, 또 인간과 신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한 고찰과 사상이 전부 담겨있다.


우리의 형상

보통 사람들은 이 "형상"(통상 영문 성서에는 "image"로 번역)을 보면 인간은 신과 닮은 모습으로 지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런 의미도 담겨있다. 분명 인간은 신과 닮은 모습도 있고 이 또한 고대 이스라엘인들만 믿었던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보면 고대 이스라엘의 인간관은 여러모로 독특하다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히브리어로 "형상"으로 해석된 "셀렘"(צֶלֶם)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영어로 "likeness"라고도 번역되는 "닮은 모습"을 의미하지만, 히브리 성서에서 이 단어는 "우상"("idol")으로 가장 흔히 번역되었다.


신의 조각상으로서의 인간

보통 "우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종교적인 우상이 먼저 떠오른다. 실제로 십계명에서도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야훼 이 외에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을 금하며 이방인들과 전쟁을 치를 때도 가장 먼저 그들의 우상들을 제거하라고 명형 한다.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셀렘"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할고
-민 33:52-


하지만 종교적 의미를 떠나 더 일반적인 "조각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서부터는 고대 근동의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수메르, 앗수르, 바벨론, 이집트 등 고대 문화에서 자신의 형상으로 거대한 우상, 조각상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왕들 밖에 없었다.

왼쪽부터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람세스 2세의 모습이 담긴 아부심벨 신전, 카이사르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은화 데나리온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석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동력과 자원이 들어갔으며 우상을 세우는 행위는 왕의 권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국가적 사업이었다. 그러나 우리 현대적 시각에서는 엄청난 국가 자원 낭비와 백성들의 인권 유린 등의 윤리적 문제부터 떠오를 수 있지만, 이 우상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역시 새로운 영토를 점령할 때마다 그곳에 자기의 석상들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작업을 감행했다. 당시에는 인터넷도 대중 매체도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지배층은 우상들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드높였다. 이집트의 백성들은 광장에 세워진 알렉산더 대왕의 석상을 보면서 그들의 주인이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이 석상은 그냥 예술 작품을 넘어서서 알렉선더 대왕의 대리통치자인 샘이었다. 문자 그래도 "우상화" 작업을 진행하는 셈이다.


로마의 독재자이자 광화정을 무너뜨리고 제국의 시대의 기초를 닦은 율리우스 카이스르도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더 견고하기 위해 로마의 화폐에 손을 댔다. 당시 로마의 동전, 특히 민중들 사이에서 흔히 교환되고 유통되는 은화에 살아있는 정치인의 얼굴을 새기는 건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흔히 역사적 위인이나 신들의 모습을 새겼는데, 카이스라는 자신의 프로필을 새겨 이를 온 제국에 유통시켰다.


이처럼 왕의 "image"를 본뜬 우상, 조각상 심지어 그림은 통치자의 alter ego, 또 다른 자아이자 분신과 같은 역할을 했다. 영국, 그리고 태국과 같은 현대 왕국에서도 국왕의 얼굴이 그려진 화폐나 초상화 등을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    


역사 속 사례?

앞서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를 잠깐 했었는데, 이 알렉산드로스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신인 제우스와 인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헤라클레스의 신화를 근거 삼아 더 굳건히 자신의 신성을 확고하게 믿었다. 아무리 패배를 모르고 페르시아 제국을 무찌른 알렉산드로스이지만 신이라고 주장하는 거 자체가 고대 그리스인들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죽하면 사료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신성을 입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집트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시와("Siwa")의 예언자를 찾아갔는데, 그는 그리스어가 서툴어 알렉산드로스를 "아들아"(Ο παιδίον / "오 파이디온")이 아니라 실수로 "제우스의 아들이여"(Ο παι Δίος / "오 파이 디오스")라고 부른 일화까지 남아있을 정도다.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던 동료인 클라이토스를 살해하는 알렉산더 대왕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부터 동방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왕 앞에 몸을 바닥에 일자로 눕혀 절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장수들에게도 동일한 수준의 대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엎드려 절하는 대상은 오로지 신 밖에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사실상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생애를 역사에 기록한 아리아노스(Arrian)에 의하면 결국 그리스인들은 타협점을 발견했다. 그리스인 신하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머리에 황금 화관을 씌우고 실제로 신전 앞에서 드리는 의식을 거행했다. 한 마디로, 알렉산드로스를 신으로 대우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신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인 것처럼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파르테논과 같은 신전에 있는 신들의 동상들은 정말로 신의 형상이라고 믿고 살아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우상은 신성하면서 동시에 신성하지 않은 존재였다. 희랍어로 "우상"을 의미하는 단어인 "조온"(ζόον)은 원래 "생명" 또는 "생명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신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 정복 전쟁을 마친 지 몇 년 안 되어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열병에 걸려 사망하고 그의 제국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야훼의 대리 통치자

흥미로운 점은 히브리 성서는 왕이나 영웅이 아닌 온 인류(אָדָם)를 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야훼의 눈에 보기에는 모든 인간이 신의 조각상과 같은 존재다. 마치 이집트, 갈라, 브리튼 섬, 히스파니아의 백성들이 자기 마을 광장에 설치된 로마 황제의 석상을 보면서 자신의 로마 제국의 신민이라는 것, 카이스르의 후예에 의해 지배를 받고 그들이 내리는 은사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다른 인간을 볼 때마다 그들은 야훼가 창시한 세상과 질서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선전물"에 멈추지 않는다. 앞서 인용한 창세기 1장 26절에 의하면 야훼는 인간에게 온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한다. 이를 바탕으로 영어권 학자들은 인간을 흔히 "보조"를 의미하는 "vice"(예를 들면 부통령인 "vice president") 그리고 "royal"의 합성어인 신의 "viceroy"("총독")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목적에 맞게 살기 위해서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세상 속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최초의 인간 아담이 만들어진 후 가장 먼저 하는 행위도 정말 유명한 일화이다.

야훼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19-


어릴 때부터 창세기 이야기를 들은 기독교인 대부분은 신이 아담에게 이를 명령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담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생물의 이름을 지었고 신은 아무런 평가 없이 그의 모든 선택을 받아들인다. 한 마디로, 인간은 신의 창조의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중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이 세셍을 창조했을 때 그 세상은 아무런 흠도 없고 완벽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야훼가 만든 세상은 분명 아름답고 선했지만, 생물들이 아직 이름이 없는 걸 봐서도 알겠지만 아직은 미완성인 상태다. 창세기 2장 19절을 봐서 알 수 있는 인간의 창조와 존재의 목적은 바로 신이 만든 세상을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주장?

세상에 그 어떠한 철학도 세계관도 이처럼 인간을 드높이는 세계관은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 많은 철학자들은 유대교 혹은 기독교의 인간관 없이는 "인권" 그리고 "존엄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주장할 정도로 독특하고 파격적인 생각이다.


최근에 개봉한 "아바타:물의 길"을 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아마 "I see you!"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 제이크 설리가 아내인 네티리에게 사랑을 전할 때, 족장에게 경의를 표할 때, 자신의 아들의 성장을 치하하고 격려할 때, 심지어 위대한 자연의 다양한 생명체의 아름다움에 경탄할 때도 "당신이 보입니다!"라고 인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인사, 혹은 애정 표현을 넘어서서 가장 근본적으로 타인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아바타" 프랜차이즈가 많은 팬들의 지지를 받는 것도 어쩌면 너무나도 근본적인 인간의 존엄성과 이에 대한 인정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인간의 참 가치를 알아가고 이해하기 위해선 그러기 위한 이유와 동기부여가 필요한데, 진짜 온 우주의 조물주인 신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내러티브가 이래서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셀렘"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 9:2-

창세기 9장 2절은 성서에서 야훼가 최초로 살인을 금지하는 명령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이웃을 같은 신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귀중한 존재라고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세상이 조금은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참고 자료>

1. Intro to the Hebrew Bible (Tim Mackie, Bible Project)
2. Ancients Behaving Badly : Alexander the Great (History Channel)
3. "The Gods of Olympus A History" (Barbara Graziosi, Profile Books)
4. "Every Good Endeavor" (Timothy Keller, Penguin)


매거진의 이전글 가족 Part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