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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ribe Mar 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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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고찰 

인간이 전하는 이야기, 문화와 세계관은 죽음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느냐따라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같다. 한편으로는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운명 때문에 인간의 삶은 그저 지나가는, 무의미하다는 주장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용맹한 영웅들에 대한 전쟁 서사로 알고 있다. 아킬레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면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전사로 기억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하지만 그는 영광을 선택하면 전장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호메로스의 다른 작품인 오디세이아를 보면 다른 영웅 오디세우스는 사후 세계에서 아킬레스를 만난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후 세계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킬레스는 영웅으로 죽는 거보다 현세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나았을 거라고 고백한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목표는 인간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인 아타락시아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기존에 플라톤과 같은 이분법적 철학자들은 영혼이 영원한 불멸의 존재였다고 믿었고 인간은 사후 세계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데모크라이토스처럼 만물은 나눠질 수 없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에피쿠로스는 한 단계 더 나가 인간의 영혼도 원자로 만들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영혼마저 육신, 동물, 책상, 나무와 동일하게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영혼은 영원하지 않고 죽음 뒤에는 심판이란 게 없기 때문에, 그의 철학을 받아들이면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인류는 어떤가? 지금은 100세 시대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린다. 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어 어쩌면 에피쿠로스가 꿈꾸지도 못한 아타락시아 유토피아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현대 인간은 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포기하거나, 잔치상에 해골을 전시한 채 광적인 쾌락을 로마인들 같이 살거나, 아킬레스처럼 죽음을 부정하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거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노선을 선택하고 아무리 환승을 많이 하더라도 종착역은 달라지지 않는다. 


죽음의 문제는 히브리 성서의 가장 중요한 소재 중 하나다.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관 안에서 인간이 직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점이며 이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다.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림 안에 숨겨진 해골을 볼 수 있나요? (Hans Holbein, "The Ambassadors")


성서의 내러티브에서의 죽음 

성서는 죽음은 인간의 죄의 가장 직접적인 대가라고 전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7)


그러나, 인간은 바로 죽지 않는다. 그러면 언제 죽는가? 아담은 이로부터 무려 930년 뒤에 죽는다(창 5:5). 독자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본을 옮겨 적던 서기가 실수한 걸로 봐야 할까? 선악과 열매를 먹은 바로 다음에 인간은 낙원으로부터 쫓겨난다. 결국 이 사건과 야훼가 말하는 인간의 "죽음"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 야훼와 공존하는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인간은 망명의 삶을 살다가 결국 약속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 역시 더 깊은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 성서의 내러티브를 따라 읽다가 계보가 나온다는 건 스토리의 한 섹션이 끝나고 새로운 챕터, 새로운 막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담의 족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음은 창세기 5장의 도입부이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 5:1,2)


우선, 이 구절만 보면 신이 세상과 인간을 처음 만들었을 때 기록된 말씀을 거의 그대로 복사해 놓은 듯하다(창 1:26, 27). 성서에서 야훼가 인간에게 복을 준다는 건 이들이 수적으로 번성(1:22)하게 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3절부터 32절까지 거의 동일한 패러다임이 10번 반복된다. 


3절부터 32절까지 아담부터 방주를 지은 노아의 세 아들까지 총 10개의 세대가 기록되어 있다. 

...은 ... 세에 ...를 나았고 / ...를 낳은 후 ...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 그는 ... 세를 살고 죽었더라 

성서에서 10이라는 숫자는 항상 독자로 하여금 창조주 야훼를 떠오르게 만든다. 왜냐면 창세기 1장을 보면 야훼가 총 10차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기 때문이다(1:3 빛/1:6-7 궁창/1:9 뭍/1:11 풀, 씨 맺는 나무, 열매/1:14 천체/1:20 물속 생명, 새/1:22 축복/1:24 동물/1:26 인간 / 1:28 인간 축복 / 먹거리)선조의 나이, 아들, 그 후 몇 세까지 살다 죽은 지 설명 후 다음 세대가 소개된다. 


신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을 연상케 하는 도입부와 천지창조 스토리와 동일한 패러다임이 반복되는 족보를 통해서 우린 어떤 걸 알 수 있는 가? 우선, 확실한 건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패러다임이 10번 반복되었다는 건 "죽었더라"는 동사도 10번이나 반복되었다는 뜻이다. 노아와 그 아들들을 제외하고 이 계보에 언급된 인간은 이 시점에 모두 죽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인간은 비록 야훼와 단절되었지만, 인간이 이들에게 준 축복과 창조의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면 새로운 세대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계속 생육하고 자손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이 바라본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거 같다. "죽음"에는 물리적인 죽음과 함께 인간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서 야훼로부터 단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낙원 안에 있을 때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의 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창 2:9). 그러나 죄를 짓고 낙원으로부터 망명한 후로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고 야훼를 찾지 않는 인간의 세상은 고통의 세상일 뿐이었다. 

야훼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이 전에도 에덴동산 추방과 바벨론 망명기가 사실 동일한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창세기뿐만 아니라 히브리 성서 전체의 내러티브를 보면 이와 같은 인간의 반복적으로 영적인 죽음에 처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사후 세계관

우리에게 '황천길'이라는 말이 존재하듯 고대 유대인들도 망자가 이승을 떠날 때 쓰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스올( שְׁאֹלָה)"로 "내려간다(וְיָרְדוּ)"는 말이다. 사실 "스올"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알 수는 없을 정도로 텍스트 자체에는 실마리가 거의 없다. 종교적 문헌임에도 히브리 성서는 신기하게도 사후세계,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천국소망"이라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없다. 하지만, 이 단어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살펴보면, 고대 유대인들이 죽음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또 이에 대한 해결책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도 알 수 있다. 


다음은 "스올"이 성서 내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일화인데,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자신의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먹혔다는 (거짓된)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애통해했다.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창 37:35) 


한국어 버전에는 "가리라"라고 해석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원래 "내려가리라"(כִּֽי־אֵרֵד, "ki ered" / 원형은 יָרַד, "ya'rad")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Yarad"는 "가라앉다", "엎드리다", "내려간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분명한 건 아래로의 움직임이 함축되어 있다. 

다음은 토라의 네 번째 두루마리인 민수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역적들에게 전하는 심판에 대한 경고이다. 

만일 야훼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야훼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민 16:30) 


이 말이 끝나자마자 정말로 땅이 갈라지고 모세에게 대항한 역적들은 그 안으로 빠져버리고 만다. 이 두 사례를 통해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스올이 땅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는 걸 우선 알 수 있다. 마치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땅 속으로 들어가 지옥을 지나가던 거처럼, 저 어디 땅 속에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 있었다고. 


죽음의 신학적 의미

흥미로운 점은 성서의 저자들은 이 사후 세계가 어떤 곳인지 소개하기보다 스올이라는 현세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황을 새롭게 해석하는 매개체로 활용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예언자 요나이다. 성서에서 예언자는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요나는 아시리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커다란 물고기에게 잡아 먹히고 만다. 다음 구절은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야훼에게 올린 기도이다.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야훼께 불러 아룄더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욘 2:2)


신의 예언자가 신의 부르심을 거역하다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요나는 오히려 물고기의 뱃속에서, 야훼가 그를 살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후 요나 3장에서 물고기는 그를 토해내고 요나는 다시 아시리아인들에게 야훼의 메시지를 전하러 떠난다. 중요한 건 요나서의 저자는 2장 10절에 야훼가 물고기에게 그리 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했다. 신의 부르심을 받은 인간이 그 뜻을 거스르고 "죽임"을 당했지만 야훼는 그를 어떤 의미에서 "부활" 시켜 그의 뜻을 이루어 내도록 하는 패러다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Jonah and the Whale" (1621) Pieter Lastman 작


또 하나의 스토리를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야곱이 죽었다고 생각한 요셉은 사실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었다. 창세기 39장 1절에 그가 이집트로 "내려갔다"(יָרַד)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요셉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창세기의 저자는 야훼가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했다고(창 39:3-4) 기록하고 있다고 이를 통해 주인에게 엄청난 신뢰를 받은 요셉이었다. 그러다가 요셉은 주인의 부인에게 모함을 당해 투옥되고 한다. 


그때,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는데, 마침 요셉이라는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이를 통해 7년 뒤 이집트에 심각한 가뭄이 오게 될 것인데 이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자리에서 파라오는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세운다. 총리가 된 요셉은 7년 동안 창고를 짓고 기근에 대비한 식량을 준비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기근이 찾아왔을 때, 이집트 백성들을 먹을 양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기근은 이집트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야곱(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거하는 가나안 땅에도 심각해, 요셉의 형들도 식량을 사러 이집트를 찾아간다. 


결국 이스라엘의 온 식구들이 이집트로 내려와서 기근을 피하고 오히려 더 번성하고 이집트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진다. 다음은 아버지 장례 후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인데, 창세기 전체의 결론이라고 봐도 무방한 구절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야훼가 선택한 족속 이스라엘로부터 홀로 떨어져 요셉은 사실 이집트라는 스올에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물고기 뱃속의 요나처럼 야훼는 그와 함께 있었으며, 오히려 그를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올려, 그를 통해 이스라엘 족속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는 데 사용했다는 걸 볼 수 있다. 


죽음 가운데 소망

요셉과 같이 신에 의해 크게 쓰이는 리더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되고 다음 두루무리인 출애굽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새로운 스토리가 시작된다. 히브리 성서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보면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결국엔 죽을 운명이라고 삶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모든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책임을 지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동시에 야훼는 항상 인간의 그 그릇된 선택마저 선으로 바꾼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야훼니라 (출애굽기 20:2)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따르는 야훼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수식어다. 이집트라는 국가로부터 이주시켜 준 고마운 신을 넘어서서 야훼로부터 단절되어 빠진 스올에서 구해내, 죽음의 족쇄로부터 해방시킨 야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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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물리적인 죽음에 대한 해결책은 아직 다루지 못했다. 더 나아가, 개별적인 인간 모두가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라면, 이 같은 사람들도 구성된 사회와 인간 집단의 죽음. "종말"도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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