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서 "비디오"라는 단어는 멸종된 동물이나 다름없다. 지금 30대 초중반 청년들만 해도 엄마 손을 잡고 만화 시리즈부터 영화까지 다양한 비디오가 진열된 가게에서 보고 싶은 걸 골라서 반납해본 경험이 있을 거다. 아버지가 당시에는 최신 영화였던 "매트릭스"를 빌릴 때 나는 우주선이 로봇으로 변신해 지구를 외계인으로부터 지키는 만화 "지구용사 선가드" 여러 편을 집어 든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비디오 가게에 가지고 못할뿐더러,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지구용사 선가드"는 옛날 만화에 대한 향수가 있던 거 같은 유투버가 시리즈 전체를 재생목록으로 게시했고 (필자도 옛 추억 때문에 와이프 몰래 본 적이 많다) "매트릭스"는 친구 넷플릭스 계정으로 그야말로 원할 때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동일한 플랫폼에 수많은 영화광들과 자칭 비평가들은 "매트릭스"의 플롯, 인물들, 제작과정부터 "매트릭스"의 세계관까지 자신들의 색깔과 개성을 살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유튜브 채널만 해도 수 십 가지다.
콘텐츠의 탄생
"비디오"라는 매체는 멸종했다. 하지만 우리는 "콘텐츠"와 거의 모든 일상을 함께 하고 있다. 미디어, 오락,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등장한 "콘텐츠"(Content)라는 단어는 원래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무언가에 포함되어 있거나 어딘가에 담겨있는 것을 뜻한다. 문자 그대로 "내용물"이다. 머그 컵에 담겨있는 커피뿐만 아니라, 소설책에 수록된 챕터들, 스트리밍 서비스에 업로드된 영화와 드라마, TV 예능 프로, 이들을 평가하는 유투버의 개인 방송까지 모두 "콘텐츠"다.
지금은 우리가 경험하는 거의 모든 형태의 미디어 엔터테인먼트를 무의식적으로 "콘텐츠"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건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현상이 아닌 거 같다. 넷플릭스, 최근에는 디즈니플러스와 같은 대형 스트리밍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콘텐츠"라는 말이 우리 뇌리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미디어를 접할 수 있는 통로가 훨씬 다양했다. 영화는 극장이나 비디오 가게, 드라마와 예능은 약속된 시간에 텔레비전 앞에 모여서 봐야 했다. 연극과 같은 공연도 물리적으로 공연장으로 이동해 표를 구매해야 관람할 수 있었다. 음악은 현장에서 듣는 것과 이어폰을 꽂고 길거리에서 듣는 또 다양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이 모든 과정이 어떻게 보면 귀찮거나, 피곤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시간을 내서 가는 영화관에는 낭만이 있고, 비디오 가게를 구경 가는 거 자체도 하나의 가족 나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인터넷의 등장과 플랫폼의 획일화로 달라졌다.
플랫폼의 획일화
"플랫폼" 역시 흥미로운 역사를 지닌 표현이다. "플랫폼"(Platform)은 원래 기차 승강장을 뜻하는 단어인데, 철도와 기차가 우리 일상에 미친 영향은 여러 권의 책을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철도와 그 위를 달리는 증기 기관차는 본래 탄광에서 석탄을 운송하던 수단이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이 발명품이 본격적으로 그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때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도시에 몰려왔지만 원래 도시 생활은 환경오염과 공장에서의 고된 노동으로 대표되며, 대부분 시민들에게 도시는 문화의 공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모든 게 기차가 대중화되면서 달라졌다.
증기 기관차의 성능이 좋아져 점점 빨라지자 신선한 식재료를 도시로 신속히 옮길 수 있게 되었고, 도시에서도 다양한 요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도시인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기 시작되었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도시 밖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발상이 흔해졌다. 이제는 몇 주씩 마차를 타거나 걷지 않고도 불과 몇 시간 내로 여행지를 다녀오는 문화가 발달하고 손님들이 더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기차 또한 문화의 공간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즉, 기차를 타기 위해 찾아 가던 "플랫폼"이,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비디오 가게, 영화관, 유튜브 모두 일종의 플랫폼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플랫폼"의 종류가 적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수의 웹사이트, 애플리케이션, 그리고 이를 다운로드해서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 디바이스가 전부이다. 원래는 그 누구도 영화를 "콘텐츠"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영화(정확히 말하자면 영화를 보게 해주는 스트리밍 사이트), 유튜브, 게임, 전자책 모두 동일한 크기의 아이콘으로 스마트폰 화면에 표시된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웹툰을 찾을 필요도 없이, 사전에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이 내 마음 몰라주는 애인보다 내 취향과 더 정확히 알고 있고, 접속 후 첫 화면이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엔터테인먼트의 "콘텐츠"화는 우리 문화와 우리 의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의식의 콘텐츠화
원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책을 제일 안 읽는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많이 제기되었던 질문 중 하나가 성도가 꼭 무거운 성경책을 들고 교회를 가야 하냐였다. 세대를 불문하고 의견들이 다양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말씀도 스마트하게 보는 시대가 되었다며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신성한 경전을 핸드폰으로 볼 수 있냐고 거센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인간이 숭상하는 신마저도 스마트 디바이스의 수많은 기능 중 하나로 전락한 거나 다름없다. 유튜브, 넷플릭스, 멜론은 우리의 재미와 희락을 담당하고, 아마존 킨들, 리디북은 지성, 그리고 여러 배달 어플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가져다주고 이제 스마트폰은 우리의 부도 키워주고 있다. 이 모든 기능들이 어깨를 나란히 나의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화면에 오와 열을 맞추어 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를 스마트하게 사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나의 생활, 나의 여가, 더 나아가 내 마음속 가장 깊숙한 생각까지 스마트 디바이스와 눈에 안 보이는 프로그램 언어에게 맡기고 사는 게 과연 정말로 스마트한 것일까?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보면, 인공지능이 점점 발달해 결국 AI를 개발한 인류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인지, 전쟁을 치른 후, 인간을 기계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자원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 또한 계속해서 "콘텐츠화" 된다면, 실제 AI는 우리를 위협으로 인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리즘, 네트워크, 스마트 디바이스 없이는 살 수 없으니까. 전쟁을 치를 필요도 없이,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을 만들 필요조차 없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