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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서점 Jul 15. 2020

잘 잃어버리는 사람의 특징

때로는 덧댄 기억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 어디에 잘 놔뒀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이 어느 순간 없다.

8살 때 만 원짜리 지폐를 달랑달랑 들고 아빠랑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는데 슈퍼에 도착해보니 빈손이었다. 10살 때 엄마랑 하루 종일 여름옷을 쇼핑하고 택시를 탔는데 집에 도착해서야 놓고 내린 걸 알아챘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탓이었을까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는 습관이 생겼다. 심지어 고등학생 때는 매일 5분 단위의 계획표를 갖고 다니기도 했다. 나에게 계획은 지키기 위한 것보다 삶의 매 순간 주의를 기울이기 위한 핑계였다. 손 끝의 무의식이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리니 모든 의식을 통제 하에 두겠다는 발악이었을지도 모른다. 물건은 잃어버려도 시간은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다짐이었다.

사라진 것에 대해 후회하는 두려움. 시간이 지나 계획은 습관이 되고 습관이 쌓여 끝내 강박이 되니 잃음에 대한 불안이 늘 도사렸다. 계획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나에겐 곧 실패였다.

스무 살 여름, 처음으로 부모님 품을 떠나 친구들과 2박 3일 여행을 가게 됐다. 장소는 부산. 첫 여행을 잘 마쳐야겠다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기 때문인지 특히나 계획이 중요한 여행이었다. 가장 가고 싶었던 장소는 둘째 날로 계획이었는데 어린 왕자가 언덕에 걸터앉아 있는 감천문화마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언덕에 있었다. 한여름, 쨍쨍한 남쪽 마을의 해가 바람이 아닌 우리에게 도전을 걸어왔을 때 우리는 아주 쉽게 언덕 오르기를 포기했다.

친구들은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계획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내 강박은 계획 변경이 본래 계획의 불이행이니까 그것도 실패일 뿐이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 하에 해수욕장 행이 결정됐다. 웬걸, 시원한 바닷속으로 풍덩 들어간 우리는 보기 좋게 5분도 채 되지 않아 호루라기에 호되게 쫓겨났다. 개·폐장 시간을 생각지 않고 당연하게 들어갔던 게 화근. 해수욕장이 원래 그렇게 이른 시간 닫았던가?

소금기를 버석거리며 해변을 어슬렁거리다 정신 차려보니 호객행위에 휩쓸려 어떤 횟집에 앉아있었다. 물론 사전조사도 없었다. 매운탕까지 깔끔하게 해치웠지만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맛이 없었다. 아주 보기 좋게 실패한 하루였다.

숙소로 돌아와 마지막 밤을 보내는데 이상하게 애틋하고 짜릿했다. 여행 전 든든했던 계획은 매 순간 유동적으로 달라졌고 계획표는 금세 꼬깃한 종이 한 장으로 전락해 재활용 수거함에 향했는데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비로소 철저한 계획에서 벗어나는 변화의 시작이었다. 한여름밤의 부산여행으로 즉흥의 의미를 알게 됐다. 우리는 스무 살에 만나 서로에게 새로운 의미를 안겨준 여행 메이트가 됐고 강릉, 담양, 양양까지 매해 무계획에 가까운 여름 여행을 떠났다.

2년이 흘러, 15년의 버킷리스트였던 페루 여행을 가게 됐다. “여자 혼자 남미 여행, 위험하지 않아?” 간절했던 15년을 생각하면 아주 계획적이기도 했지만 또 아주 즉흥적이기도 했던 출발을 앞두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질문보다는 걱정과 경고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겠단 생각에 정작 본인은 큰 걱정이 없었다. 다만 인위적인 여행은 싫어서 도시의 종류만 훑어봤다. 내가 30일간 지키려고 애쓴 여행자의 공식은 사람 많은 곳으로 다니고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는 것, 낯선 이의 접근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여행지의 경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에 불과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결코 쉽지 않았던 시차 적응은 첫날부터 쌍코피로 경고를 해왔다. 하지만 여행은 가까스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편이었다.

30일, 누군가는 남미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긴 시간이지만 페루에서만 사치스럽게 시간을 소비했다. 그조차도 계획에 없던 일이었지만 더욱 즉흥적이게 볼리비아 우유니행을 결정했다. 원래 아마존을 가고 싶었는데 남반구의 겨울에는 정글 여행을 추천하지 않는다는 투어사의 충고에 방향을 틀었다. 그런 호기에도 어쩔 수 없이 나는 놓치는 시간과 선택에 대한 두려움에 망설였다.

“아빠, 나 우유니에 꼭 가야 할까? 국경 넘는 건 조금 빠듯한데...”
“누구는 평생 접하기도 어려운 기회를 얻었잖아.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왔으면 좋겠어. 다녀와봐.”

남미 여행자들에게 즉흥적인 볼리비아행을 알리자 모두 발 벗고 나서 도와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귀국 비행기를 왕복으로 끊어 놓은 터라 시간과 자금은 모두 제한적이었고 막상 떠나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게 현실의 장벽일까. 그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스냅사진 작가분이 나타나 커피까지 사주시면서 남은 내 여행 방향을 정리해주셨다.

결국 나는 옷을 다섯 겹 껴입은 채 우유니 사막의 한 복판에 섰다. 쏟아지는 별 아래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마젤란 성운과 밤을 보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는 경이 안에서 사진이 담지 못하는 별까지 눈에 가득 담아올 수 있었다. 무계획 페루 여행, 즉흥적인 볼리비아행, 갑작스러운 낯선 이의 도움.

때로는 덧댄 순간이  기억에 오래 남기도 한다. 커다란 아빠의 검지 손가락만 붙잡고 집 앞 슈퍼보다 더 멀리 학교 쪽문을 통과해 아이스크림을 사러 다녔던 순간, 쇼핑을 핑계로 엄마랑 명동 데이트를 다니다 지칠 땐 카페에서 쉬어갔던 순간이 더 선명했다. 그땐 아이스크림을 살 수 없었고 애써 고른 옷도 사라졌지만 실패도 분실도 후회도 아니었단 걸 이제야 알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일부를 잃어서 더 가득히 채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찰나의 부주의가 두렵지 않다. 시간을 놓아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때로는 비어가며 선보다는 점선으로 이뤄진 나. 분 단위 초 단위 계획으로 옭아맸던 순간보다 느슨한 너그러움이 날 이룬다는 걸 알게 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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