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이 무너진 건 칠 년 전이다. 딸아이의 급작스런 발병과 진단, 그리고 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큰 수술. 그 이후로도 극심한 복통과 두통, 부정맥 증상에 시달리면서 고혈당과 저혈당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하였다.
몇 년 동안을 한밤중에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총알택시를 타고 마음 졸이며 향했고, 외래진료와 끝없는 검사, 그리고 한 번씩 입원하는 싸이클이 반복되었다.
한국에서 이 질병에 제일 명성이 높은 주치의가 수술 당일날 아침에 브리핑을 하면서, 일주일 만에 종양의 크기가 20프로 이상 커져서 "수술 못 하고 그냥 나올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둔기로 머리를 쎄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스테이션에서 병실로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아이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공포로 손발을 덜덜 떨며 피 토하는 울음을 토해냈다. 그렇게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열몇 시간이 넘는 수술을 기다렸다.
수술장 앞에서 녹초가 된 의사가 수술 결과를 설명해 줄 때, 나는 그 사람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으라는 건가..
열네 살의 어린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었다. 자기 몸을 받아들이는 것도, 새로운 기계에 적응을 하는 것도, 하루에 네다섯 번씩 혈당을 검사하며 식사를 조절하는 것도. 밖에서 하루종일 뛰어놀고도 힘이 넘쳐나던 아이가 이제는 집 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지켜봐야만 하는 게 고통 그 자체였다.
퇴원한 지 얼마 안 된 날 밤, 비쩍 마른 아이가 내가 누워있는 어두운 방으로 들어왔다.
내 옆에 무릎을 감싸 앉고 얼굴을 파묻은 채로, 딸아이는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밖에서 뛰어놀고 싶다고.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없냐고." 하면서 낮은 소리로 흐느꼈다.
그때 나는 아무런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고, 아이를 안아주지도 못했다. 나는 나의 애통함과 고통을 견디느라 아이의 비극을 토닥여 줄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다.
일주일만이라도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너의 병을 늦게 발견하게 돼서
엄마가 너무 미안해.
2023. 4. 21. 칠 년 전 잊혀지지 않는 그때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