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인정하기 싫지만, (원래 옆에 있는 사람은 다 별로인 것처럼 보이는 게 사람의 심리다.) 의사 남자는 결혼 시장에서 최상위 포식자이다. 안타깝게도 의사 여자는 그렇지 못하다. 전임의 시절, 전공의 교대로 새로운 전공의가 왔다. 서로 이야기하다가 애가 있다고 하니,
"에?, 결혼을 하셨어요?"
라며, 매우 놀라워했다. (정말 동공 지진이라는 단어를 현실에서 이럴 때 쓰는구나 했다.) 본인도 말을 하고 나서 아차 싶었는지, 정형외과 여자는 안 그래도 별로 없는 데, 자기가 아는 한둘은 다 결혼을 못해서 (제삼자에 의해 결혼을 못했다고 단정 지어지는 것도 슬픈 일이다.) 당연히 나도 결혼을 안 했을 줄 알았다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의대라고 하루 종일 의학만 배우는 건 아니고 인문 사회학 수업도 간간히 있는데 하루는 여자 원로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들어오셔서 말씀하셨다.
"수업 시간에 옆에 보이는 동기가 좀 별로인 거 같아도, 나중에 여자 의사가 결혼 시장에 나가면 더 적당힌 배우자를 찾기가 힘드니 꼭 졸업 전에 하나를 잡아다 결혼하세요."
모두가 한 번은 들어본 결혼 시장의 진리는 A급 남자는 B급 여자와 이어지고, B급 남자는 C급 여자와 이어져서 결국에 A급 여자만 시집을 못 간다고는 하는데 확실히 여자가 고학력이면 결혼하기 좀 힘든 바가 적잖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고 보는데, 이 급이 직업과 연 소득이라고 가정할 때, A급 남자는 A급 여자를 만나든, B급 여자를 만나든, C급 여자를 만나든 본인이 결혼에 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일치하면 결혼을 하는데 A급 여자는 대부분 같은 A급 남자만 만나려고 하는 게 더 결혼을 어렵게 하는 부분인 것 같다.
주변에 다양한 전문직 여성들이 있는데, 밖으로 보이는 남편의 직업이 여자의 직업보다 좋았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나 있다. 남을 말하기 전에 나부터도 그랬다. 전문직 여성의 결혼은 최대한 비슷한 전문직을 찾거나, 직업과 무관하게 결혼을 하거나, 아님 결혼을 안 하고 본인의 커리어를 쌓거나 셋 중의 하나이다. 내 주변의 스몰 샘플이지만, 생각보다 직업과 무관하게 결혼을 한 사람들이 좀 더 존중받고 안정적인 결혼을 하는 느낌이다. 오히려 결혼할 때 결혼에 있어서 더 중요한 다른 가치들에 집중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 주변 지인들 한정이기는 하나, 오히려 시댁에서, 남편에게서 더 이쁨 받고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이런 결혼 생활에 대해서 나는 결혼 전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이런 이야기를 꼭 젊은 후배 여자 선생님들에게 해준다.
수술장에는 인턴 선생님이 들어오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수록 꼰대가 되어 가서 환자 상처 부위 봉합을 하고 있을 때는 가끔 호구 조사를 했다. 특히 여자 선생님이 수술장에 들어오면 기혼 여부를 물어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저런 결혼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 이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없다면 다들 흥미로워했다. (모 내 앞이니 흥미롭게 듣는 척했을 수도 있으니 진실은 알 수 없다.) 사실 여전히 대부분의 여의사들은 여의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결혼은 남자 의사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사끼리 결혼했을 때의 장점은, 서로 긴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이해해 준다는 점이고, 단점은 서로 너무너무 잘나신 분들이라 양보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결혼을 한다는 건 대부분의 경우, 시댁이 생기고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추가되고, 애를 낳아 기르는 것을 포함한다. 사실 의사는 제 한 몸 챙기기도 버거운데, (특히 수련과정의 경우) 여기에 부모로서의 역할과 사위/며느리로서의 역할이 추가되면 생각보다 조율이 잘 되지 않는다.
나는 4년 차 때 출산을 하였다. 우리 때만 해도 11월 경부터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과는 다르지만 같이 4년 차였던 남편이 자기는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애는 이제 갓 6개월이 되었는데 네가 공부에 집중하면 애는? 나는 모 공부에 집중 안 하고 싶은 줄 아냐고 싸워 봤자 답이 없는 평행선이었고, 결국 최소한 밥하고 빨래하는 시간이라도 아끼자고 애를 데리고 지방의 친정으로 내려가서 오른손에는 책, 왼손에는 젖병을 들고 공부했다.
명절이 되면 수술장에서 단골 대화 주제는 시댁이다. 수술장 간호사님들은 대부분 여자고, 내 수술장에 여자 인턴이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시댁은 끊이지 않는 대화의 샘이 된다. 언젠가는 간호사님이 수술장에 말하기를,
"와, 그래도 여자 의사쯤 되면, 결혼 생활이 다를 줄 알았는데 별 차이 없네요?"
저 말을 듣는 순간에 머릿속에 울렸던 다른 말이 있다. 내가 전공의 때 임신하여 만삭의 배로 돌아다닐 때의 일이다. 당시 교수님 한분께서 둘째는 언제 낳을 건지 여쭤보셨다.
"선생님, 하나도 제 인생에 무리입니다."
아냐 애는 낳아놓으면 알아서 크니까, 엄마 닮은 똑똑한 애를 많이 낳아야지.
교수님은 웃으면서 칭찬으로 해주신 말씀이었지만, 애가 알아서 큰다는 말에 사모님의 고충이 갑자기 엄청나게 느껴졌었다. 우리보다 윗세대의 남자 의사 선생님들의 경우, 사실 0에 수렴하는 육아 참여도를 보여 주셨고 의사로서 본인에만 충실하시면 되셨다. 막연히 학생 때에는, 교수님들 중에 여자 의사가 많이 없었고, 결혼 후에도 반짝반짝하는 본인의 삶을 사시는 교수님들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현실은 좀 많이 달랐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후회했던 적조차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어차피 바꿀 수 없는 현실을 가지고 후회할 시간에 우리 아이들을 좀 더 사랑하기로 했다. 아이들을 키우는 건 나에게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딱 하나에만 집중하지는 않는다. 하다 못해 고3 때도 국어도 하고, 영어도 하고, 수능도 하고 논술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내가 세계의 전부이다. 이 아이는 내가 화를 내도 나에게 오고, 내가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에게 온다. 얼마나 경이로운 애정인가. 아이들이 나를 사랑해 주는 만큼은 꼭 돌려줘야지라고 생각하는데 이조차도 쉽지 않다. 오늘은 퇴근하면 한번 더 꼭 안아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