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이야기
올해 아이가 9살이 되면서 느낀 건 부모로서의 내가 참으로 간사하다는 것이다. 임신 중에 내가 내 아이한테 바랬던 것과, 아이가 커가면서 아이한테 바라는 것이 달라진다. (달라진다고 표현했지만 점점 커진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이렇게 아이한테 바라는 것이 하나하나 늘어날 때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를 떠올리며 내가 아이한테 처음으로 바랬던 것은 무엇인가 생각한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마찬가지 겠지만 임신기간 중에는 모든 초점이 아이가 건강히 태어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손가락, 발가락은 다 있는지, 다른 병은 없는지, 이런 부분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 특히 병원에서 일하는 엄마는 정말 별별 케이스를 보게 되고,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무사히 건강하게만 태어나라를 외치게 된다. (이 글을 읽는 소아과 선생님들도 있겠지만, 의사들 사이에서는 소아과 엄마가 제일 무서운 엄마라는 소문이 있는데 이유는 너무 아픈 애들을 많이 봐서 네가 사지 육신 멀쩡 해서 건강하게 태어났는데 이것도 안 할래 / 이렇게 막살래 하고 혼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또 이런 이야기를 소아과 친구들한테 하면 나 같은 수술 하는 외과 의사 엄마가 원래 더 무서운 거 아니냐고 한다.)
나는 20대에 전공의 일 때 첫 아이를 임신했었다. 특별히 기저 질환이 없는 젊고 건강한 엄마라는 쓸데없는 자부심이 있었다. 병원 앞에 붙어 있는 오늘의 진료 환자 중에서 내 나이는 어린 걸로 3-4번째에 들었고, 나름 정형외과 의사로서 체력과 건강 상태에 자신이 있었다. (우리 과는 정말 힘을 많이 쓰는 과라서 그때나 지금이나 20킬로 정도는 거뜬히 든다.) 아 자신감으로 나는 그 흔한 태아 보험도 안 들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데, 이렇게 건강한 내가 20대에 임신을 했는데 애가 어떻게 안 건강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자부심은 초반부터 산산조각이 났다. 임산 초중기에 시행한 피검사에서 아이가 다운증후군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양수 검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근무하던 병원에서 산부인과 진료를 보던 중이어서 너무나 감사하게도 산부인과 교수님께서 오늘 오후 외래가 끝나고 저녁때 바로 양수 검사를 해준다고 하셨다. 진료 후 펑펑 울면서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전화했는데 남편의 첫마디는 바빠 끊어였고, (본인 말로는 옆에 교수님이 계셔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임신한 와이프가 울면서 전화를 했는데...) 정말 펑펑 울면서 오후에 일을 어떻게 했나 기억도 나지 않은 채 시간이 되어 양수 검사를 하러 갔다.
나는 안타깝게도 이날 당직이어서 양수 검사를 위해 누워 있으면서 응급실 전화를 받고 있었다. 병원에서 흔히 하는 농담 중에 전공의는 공노비, 펠로우는 사노비라는 말이 있다. 남편도 나와 함께 공노비 신분이었던지라, 저녁 6시에 업무가 끝나는 건 어불 성설이었고 (지금은 전공의 80시간 근무로 나아졌다고는 하는데 내가 겪지 않은 일인지라 알 수가 없다.) 응급실 전화를 받으면서, 남편도 없이 혼자 하는 양수검사라니. 정말 그날은 남편의 전화와 더불어 살면서 손에 꼽게 서러웠던 날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애가 다운증후군이면 나는 키울 자신이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다행히 검사 결과에는 이상 소견이 없었지만, 이 후로 나의 건강 염려증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일 이주에 한 번씩 초음파 실에서 남편과 아이의 심장은 잘 뛰나 초음파를 보고, 안도하는 날들이었다. 내가 수련받던 병원은 로테이션 근무여서 2달에서 4달에 한 번씩 근무 병원을 옮겨가야 했다. 그래서 산부인과 선생님도 한분에게 지속적으로 진료받지 못하고, 근무 병원이 바뀔 때마다 산부인과를 바꾸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그나마 안정적인 임신 중기를 지나고 막판에 나는 임신 중독증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혈압이 지속적으로 높게 관찰되고 숨이 찼다.
하루는 정말 너무너무 숨이 찼다. 정말 근무시간 끝날 때까지 버티고 버텨서 분만실을 찾아갔다. 분만실에서 이렇게 숨이 차면 엑스레이랑 심전도를 찍어 보자고 하였다. (임신 중 엑스레이는 정말 내가 전문가라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공부하였다. 이 이야기는 따로 한 꼭지를 내어 글을 쓰도록 하겠다.) 심전도는 검사를 받아보신 분은 알겠지만 가슴 앞쪽에 리드를 붙여서 검사를 진행한다. 즉 검사자가 가슴을 볼 수밖에 없다. 의사가 환자 가슴을 보는 건 문제가 안되지만, 내 입장에서는 단순 의사가 아니라 직장동료가 내 가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심전도 기계를 끌고 인턴이 왔는데 남자 인턴이었다.
"인턴 선생님, 기계 두고 가시면 제가 알아서 찍어서 결과지 출력해 놀게요"
혼자서 기계를 꾸역꾸역 작동해서 심전도를 찍고 나서 다시 인턴 선생님을 불러 검사 결과지를 드렸다. 다음 해에 새로 들어온 1년 차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선생님이 내게, ‘선생님 제가 그때 선생님 심전도 찍을 뻔했던 인턴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스스로 찍은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서로 한동안 민망할 뻔했다.
임신 시기 동안에 너무나 고마운 분들이 많았다. 나는 우리 의국에서 처음으로 임신한 전공의였는데 주변에서 다들 걱정이 많았다. 남자가 많은 과에서 임신/출산을 이해하고 배려해 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그 당시 교수님, 동기들 그리고 후배들이 아니었으면 건강히 아이를 못 낳았을 것이라는 거다. 오히려 여자보다 더 섬세한 배려에 감동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병원에서 제일 마초 같은 과를 뽑으라고 하면 정형외과를 뽑는데, 내가 임신 중에 겪은 우리 과 남자들은 Mannes, makyth men이라는 문장의 뜻을 가장 완벽히 표현하는 신사들이었다. 가끔 정형외과 의사들은 좀 무뚝뚝하고 너무 세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들이라고 자신한다. 이런 파란만장한 임신의 시기가 끝나가고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출산 이야기는 다음 글에 이어서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