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말로프 내한공연
아티스트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익살스러운 전자음이 공연장을 채운다. 자신의 등장음악을 골라온 것인가,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공연치고는 새롭다고 생각할 찰나 세르게이 말로프가 어깨에 전자바이올린을 올린 채 활로 문지르며 들어온다.
클래식이 주로 연주되는 공연장인 만큼 전자음이 들려올 일은 거의 없고, 인사도 전에 연주를 하면서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것이 실제 연주였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며 음악 소리에 빠져든다. 오히려 그 낯섬과 긴장 때문이었을까,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 대한 흥미는 배가된다.
어떤 종류의 자연스러움과 그에 모순된 새로움이 공존하는 첫 도입부의 몰입의 경험. 이것이 이번 세르게이 말로프 내한 공연에 대한 첫 감상이다.
그간 살면서 외국인 친구를 만들었던 적이 몇 번 있다. 우리 학교에 교환학생을 왔던 중국인 유학생, 미국에서 인턴하던 시절 친해졌던 회사 동료, 스페인어 공부를 하겠다고 무작정 대화를 나누었던 현지인, 그리고 친구를 통해 소개받았던 일본인 친구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이 모두는 결국 오랜 사이로 발전하지 못했는데, 그건 아마 언어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말에 뭐했냐는 질문에 로터리에 당첨되어 10분의 1가격으로 보고 온 뮤지컬 라이온킹에 대한 감상을 말하고 싶었다. 그 중 둘 정도 인물의 말이 지나치게 빠르고 사투리 억양이 강해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공연 전 먹었던 텍사스 바비큐의 맛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전하고 싶었다. 오가는 길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과 느낀점에 대해서도. 그러나 ‘뮤지컬을 봤는데 나쁘지 않았어’ 정도로 일축하고는 결국에 웃고 말던 우리들.
내가 다른 언어권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느끼던 것들은 보통 이런 형태이다. 속에는 말하고 싶은 것들이 넘실거리지만 결국에는 알고있는 단어와 문장들로 내 마음을 표현해야하기 때문에 하고싶은 말보다는 ‘할 수 있는 말’위주로 진행되는 대화, 그에 따라 피상적으로 겉돌고 마는 우리의 관계.
음악이나 각각의 콘텐츠가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하는 나는 기타를 칠 때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밴드 합주를 할 때 내가 자주 사용하는 건 몇 개의 구성음으로만 이루어진 코드톤이나 3도, 5도의 꾸밈음 혹은 펜타토닉 스케일 정도. 내 마음속에 자리하는 멜로디와 릭은 나의 화성학적 지식과 손놀림의 한계로 인해 태어나지도 못한채 사라져간다.
이번 공연에서 내가 느낀 가장 큰 감각은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기술적 완숙도와 화성의 이해, 다년간의 무대경험, 그리고 자신감에서 비롯했을 연주는 표현의 한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박자와 음에 실어 널리널리 퍼뜨릴 수 있는 듯 보였다. 클래식하는 사람치고 이렇게 자유롭고 편하게 하는 연주를 근래에 본 적이 없다.
실용음악이나 재즈와 비교했을 때 클래식 음악은 특유의 경직성과 힘있음을 가지는 듯 보인다. 해석의 음악으로써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울타리가 있다고 해야할까. 물론 그 안에서 얼마나 섬세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개해나가는가는 연주자의 역량을 판가름하는 지점이지만 나는 클래식 연주자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본다. 그러나 세르게이 말로프는 그 틀에서 한 걸음 밖으로 발을 딛고 있는 듯 보였다.
4월 23일 화요일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진행된 이번 연주에서는 러시아의 거장 세르게이 말로프가 < 21세기 바흐의 음악을 만나다 >라는 주제로 비올론첼로 다 스팔라(어깨첼로), 전자바이올린, 루프 스테이션을 통해 바흐 모음곡을 기반으로 다양한 즉흥연주를 선보였다.
여타의 연주자에 비해 사용하는 악기가 다양했고, 이펙터와 루프스테이션을 적극 사용하면서 보편적인 형태의 클래식 공연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참신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바흐의 곡을 해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중간에 약 40분 가량의 아주 긴 즉흥연주가 이어졌는데, 자신만의 테마를 활용해 색다른 형식으로 공연을 이끌어가는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인 테마의 부재가 느껴져 아쉬움이 남았다. 연주기법과 이펙터를 활용해 여러 테마를 확장하여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도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테마가 너무 빠르게 변화한다고 느껴졌다. 좋은 테마의 경우에도 반복적으로 연주되며 관객들에게 익숙해지기도 전에, 일회성으로 사용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어 아쉬웠다.
공연장에 가서 관람할때는 관객의 분위기도 놓칠 수 없는 관람의 요소 중 하나인데, 긴 즉흥연주 시간동안 테마가 계속해서 변주되자 전반적으로 집중이 흐려짐이 관객의 자리에서도 느껴졌다. 즉흥연주의 매력은 자유로움이지만, 일정한 테마를 중심으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연주를 하거나 자유롭게 멜로디와 라인들을 풀어놓은 뒤 다시 원래의 테마로 돌아와 해결되는 느낌을 주는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돌아올 거점 없이 관객들을 긴 시간 이리저리 이끌고다니니 예측할 수 없어 다소 피로하게 느껴진 지점이 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연주 내내 보여주었던 자유로운 표현들과 테크놀로지를 결합한 클래식 기반의 연주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내가 가진 아쉬움은 오히려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리하자면, 잘 정돈된 연설은 아니었으나 언제든지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능숙한 이야기꾼의 면모가 느껴지는 무대였다.
내가 루프스테이션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이 영상이었다. 음악을 전공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도 듣고 실제로 시도도 해보았는데, 루프스테이션은 녹음된 것들이 계속 반복하면서 음을 쌓아가기 때문에 작은 실수나 잡음도 간단히 흘러가지 않고 재생반복되며 음악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보다 디테일하고 깔끔한 연주실력이 필요하고 음악에 대한 이해와 악기를 다루는 숙련도도 요구된다.
어려운만큼 연주자의 음악 스타일이나 개성이 짙게 드러나고 현장성이 중시되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장르인지라 라이브 공연으로 보게 될 날을 오래 기다려왔다. 이런 이유로 이번 공연에서도 루프스테이션의 적극 활용을 기대했으나, 장비들을 리버브 등 이펙터의 용도로 더 많이 활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이번 무대가 세 종류의 다양한 악기를 기반으로 연주되었기 때문에 위의 영상에서처럼 사운드를 보다 적극적으로 섞어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후반부에 이런 아쉬움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기는 했다. 전자바이올린으로 루프스테이션을 활용했고, 자연과 파도소리 새소리 등을 멜로디와 결합하여 연주해낸 형태의 곡 진행이 인상깊었다. 아마도 음역대를 나누어 설정해서 특정 음역대에 특정 효과가 적용되도록(저음에는 파도소리, 중간음역에는 바이올린 소리, 고음은 새소리 등으로) 설정하여 뉴뮤직테크놀로지가 결합된 형태로 연주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런 연주는 기존의 클래식 공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라 나의 음악세계의 지평이 확장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기존 음악들의 권위가 강하고 정해진 음악과 틀이 비교적 공고한 클래식 장르에서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다니 놀라웠고, 예술의전당에서 연주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어보였다. 기대했던만큼 즐거웠고, 그렇기에 더 많은 것을 보고싶은 아쉬움이 남는 무대였다.
세르게이 말로프, 클래식을 사랑하고 다양한 시도와 현대음악을 사랑한다면 기억해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