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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Apr 29. 2024

우리의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슬로우리딩 13기 <랩 걸> 을 읽고

저녁 8시.  


“나갈까?”

“뛸 거야?”

“응.”

“알았어.”

주섬주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핸드폰을 챙겨 운동화를 신은 후 집밖으로 나간다.

“엄마, 아빠 나갔다 올게.”

“어디가?”

“이 시간에 어디 가겠니?”

“응, 조심히 다녀와.”


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니 7층에서 내려온 커다란 레트리버 브라보와 견주가 있다.

“챠오.”

“챠오.”

덩치와 다르게 얌전한 브라보는 우리 아파트에서 꽤나 유명인사다. 그걸 자기도 아는지 마치 사람인양 점잖다.

“보나세라따(좋은 저녁 보내)!”

“안께 보이(너도!)!”

서로 인사를 나눈 후 나와 남편은 공원으로 뛰어간다. 바로 집 옆에 있는 공원 이름은 ‘Parco delle Cave’ 이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채석장 공원”이랄까. 그런데 이곳엔 돌 깨는 채석장은 없고 큰 호수가 3개, 작은 호수가 몇 개 더 있다. 그 호수 주변으로는 100년도 넘어 보이는 나무와 꽃과 풀, 갈대와 민들레가 무성하다. “저기 좀 봐, 유채꽃이 진짜 예쁘다. 곧 양귀비 꽃이 피겠네.”

“그러게, 봄이네.”

"벌써 이곳에서 세 번째 봄이라는 게 믿겨? 1년이나 버틸까 싶었는데 벌써 3년 차라니....”

“그러게....”


남편과 나는 공원 안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제멋대로 자라는 나무와 풀을 바라본다. 어색하고 낯설었던 이 광경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 오히려 마음이 노인다.




밀라노에 온 지 3년 차가 되었다. 해외생활 12년 중 겨우 3년이니 우리의 인생에서 1/4만큼의 삶이겠지만, 우리의 전 생애를 관통한다.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고 첫 발을 디뎠고, 힘겹게 적응했으며, 되돌아갈까를 수십 번 고민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곳에서 계속 살 수 있을지 알지 못했고, 지금도 알지 못한다. 선택은 우리가 했지만, 유지는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본사와의 이해관계, 현지 법인의 매출과 사업 가능성, 현지 직원과의 마찰, 현지 파트너 회사와의 문제 등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복병은 언제든지 존재했고, 일상이 조금 안정된 듯 보이면 여지없이 무기를 들고 우리에게도 달려들어 마음을 혼란케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잘 다니고, 내가 집안을 잘 꾸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학교도 집도 회사에서 월급을 주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살아 있는 식물 중 가장 오래된 식물류는 쇠뜨기라고 부르는 속새류의 식물이다. 현재까지 번창하고 있는 속새류 중 열다섯 가지 정도 되는 종은 3억 9500만 년의 지구역사를 목격해 왔다.... (중략).... 페리시라는 이름의 잡종 쇠뜨기는 번식을 하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일부가 떨어져 나가 다른 곳에 정착하는 방법만으로 종족유지를 한다. 오래된 식물이고 번식 능력도 없지만 페리시는 캘리포니아에서 조지아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다. 그들도 새로 학위를 받은 박사처럼 나라 반대편에 있는 새로운 기술 대학에 이사해서 목련과 달콤한 차를 발견하고, 깜깜하고 습한 밤에 반딧불을 보며 불확실성에 대해 생각했을까? 아니다. 패리시 쇠뜨기들은 살아 숨 쉬는 생물답게 땅을 건너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린 다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랩 걸, 136p>





원자폭탄이 떨어져 폐허가 됐던 일본 히로시마에서 가장 먼저 새싹을 틔운 것이 쇠뜨기였다고 한다. 방사능의 열선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뿌리줄기가 땅속 깊이 뿌리를 뻗는 것이다. 그만큼 강인한 식물이어서 제거하기 매우 어려운 잡초라고 한다.


랩 걸의 저자 호프 자런 박사가 자신의 삶을 쇠뜨기에 비교했을 때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내가 그 낯선 땅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걸 나는 알아.”


남자들의 성역이었던 과학의 세계에서 여성 과학자로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최선을 해야 했을까?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식물과 토양을 연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모한 고집일까? 아니면 고귀한 집념일까?


다행인 것은 그녀의 삶이 무모한 고집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들을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와 같은 해피엔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텅 빈 방을 우리가 언제나 계획하고 꿈꿔왔던 실험실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본 빌의 눈에 감탄했다. 과거의 꿈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었지만, 그는 우리의 새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도 그 삶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랩 걸, 133p>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암담한 현실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시선.

그리고 결국 그 가능성이 이루어진 것을 목도했을 때의 감격.

이것은 가능성을 투시할 수 있는 빌의 시선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호프 자런의 고귀한 집념이 만들어 낸 해피엔딩일 것이다.




“올해 11월에 레미제라블 공연하는데 티켓 예약해야겠다. 작년부터 홍보를 하던데 올해 11월에도 밀라노에 있을지 몰라서 예약 못했거든. 지금이 4월이니까 올해 말까진 여기 있겠지?”

“그렇겠지?”

“진짜  보고 싶은 공연이었는데 애들이랑 같이 가야겠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미리 할 수 없었던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계획을 세운다.

나는 미뤄두었던 이탈리아어 공부를 하고, 남편은 관심도 없었던 세일즈에 대한 공부를 하고, 아이들은 대학과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언제 또 어디로 갈지 모르는 우리의 삶이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는 불안정한 우리의 삶도 사랑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2021년 6월에 헤르만 헤세의 에세이 "어쩌면 괜찮은 나이"로 시작한 슬로우리딩이 어느새 만 3년 차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슬로우리딩을 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동안 슬로우리딩 멤버들과 함께 읽은 책은 인문학 책을 비롯해 철학책과 과학책, 교양, 자기계발서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었습니다.

멤버들 중에는 1기 때부터 13기까지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참여하신 분도 계시고, 최근에 합류하셔서 열심히 읽고 나누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남들은 한 달에 100권도 읽는 요즘 세상에 3년 동안 겨우 13권 읽은 게 무슨 대수일까요?

하지만 저희는 자부합니다.

느리고 깊게 읽은 책 한 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희 슬로우리딩 클럽은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읽고, 필사하고, 단상 쓰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세이를 한편 써서 제출해야 합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서로 다른 생각의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고, 즐거운 작업입니다.


다음 책은 요즘 대세인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을 읽기로 했습니다.

철학책을 읽으며 우리가 느낄 또 다른 인사이트가 기대됩니다.


슬로우리딩 14기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댓글로 문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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